15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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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글/책을 읽고 난 후 2011. 11. 16. 12:21

     

    ' 나무아미타불" 이란  " 오 ! 주여 ! " 가 아니라 " 돌아가 귀의한다 " 는 뜻 ...    

    그 세계에 가고 싶은 희망자는 나무아미타불을 지극하게 부르면 죽은 후에 그 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토가 반드시 서쪽의 그 많은 국토를 지나서만 있다고 할 수 없다. 

    "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그 자리가 정토다' 라는 교설로 보면 불교의 초점은 분명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있는 것.....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디로 움직이고 있건 아랑 곳 없이 초연하려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가 속한 종교는 현장 밖에서 말라 죽을 것이다.

    지혜와 자비가 모든 이웃을 위해 청정하게 베풀어 지지 않고 나만의 이해 관계 때문에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무한한 광명도 영원한 생명도 될 수 없다. [한국 불교의 현실을 깨우다]

     

    과거를 따르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 것,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당면한 현재의 일들을 자신의 처지에서 잘 살펴 흔들림 없이 바르게 판단하라.

    그리고 그 경지를 더욱 넓혀라.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에 전력을 기울여라,

    누가 내일에 죽음이 있을지 알 수 있는가. [불일암에 들어서다]

     

    낯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을 자기 자신에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이와같은 휴식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축적하게 되고 일을 통해서만 휴식을 얻을 수 있다.

    평소에 일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한 휴식을 누릴 수 없다.

    휴식과 일은 그런 상관 관계를 지닌다.

    [삶의 여백, 그리고 선 수련회]

     

    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울 수 있다.

    그러난 살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여건 아래서라도 죽을 쑤고 마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다.

    우리 몸에 짐승처럼 털이 돋지 않은 것은 옷으로써 알맞게 가리라는 뜻이다.

    풍요한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정신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 날 기약이 없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히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보람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빈 껍질이다.  [ 풍요한 감옥, 그리고 치유]

     

    겪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렇다 할 죄상도 없이 자기네 와 다른 뜻을 지녔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끌려가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고 치욕적인 심문을 당할 때 무엇보다 슬픈 사실은 어떻게 똑같은 인간끼리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사람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연민의 정마저 울어날 때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은 더 말 할 것도 없이 의심하고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고 돕고 사랑하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태어난 이웃들이다.

    이렇게 만난 이웃들이기에 사람답게 살 수 있으려면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웃을 찾아 나서다 1]

     

    어떤 사회 운동이 되었던 간에 그 운동에 긍정적인 평가와 가치를 부여하려면 그 운동이 곧 개인의 인격형성과 이어져야 한다. 

    목적 달성만을 위해 수단 방법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전한 운동이 될 수 없고 인격형성의 길일 수도 없다.

    그리고 간디의 여러말 중 이 말을 끝에 두었다.

    " 절망에 빠질 때마다 나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서나 진리와 사랑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

    [이웃을 찾아 나서다 2]

     

    차의 세계에 일기일회란 말이 있다.

    일생에 단 한번 만나는 인연이란 뜻이다.

    개인의 생애로 볼때에도 이 사람과 한 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번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몇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연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 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일도 그렇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만남도 그래야 하고 크게는 나라 일을 경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서로 미워하며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과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 위해 찾아서 만난 이웃이요 겨례다.

    사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 [ 일기일회를 말하다 ]

     

    불교 경전에서 연꽃을 비유로 드는 것은 어지럽고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다

    [ 연못에는 연꽃이 없다]

     

    우리는 마약중독자처럼 습관적으로 신문을 펴쳐 보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보도된 내용을 살펴 보면 득보다는 해가 훨씬 더 많다. 

    특정 정당의 대권 후보 경선이 무엇이기에 언론에서는 날마다 머리 기사로 다루고 까불어대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보도가 우리들의 삶에 무슨 득이 될 것인가.

    양식과 형평을 잃고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언론의 횡포가 우리들의 맑은 의식을 얼마나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뒷날 산에서 내려 와 배달된 신문을 펼쳐 보고 솔직히 말한다면 이건 시끄러운 소음이요. 쓰레기 더미이다

     

    어떤 종교 성전에는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이 자신의 모습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진실이고 사실이라면 그 피조물인 인간 또한 신처럼 완전한 존재여야 한다.

     

    오늘날 절과 상당한 교회는 순수한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상업주의에 너무도 많이 오염되어 있다.

    돈 없이는 절이나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심을 돈으로 재려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우리는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가르침을 듣는다.

    종교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이며 선의 세계가 어떻다고 외치는 소리가 정기적인 집회마다 시끄럽게 넘친다.

    그러나 곰곰이 귀를 기울여 보면 얼마나 메마르고 공허하고 관념적인 소리인지 그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인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기 선전을 하는 사람치고 그에게서 깨달음의 행을 본 적이 있는가.

    [ 더 깊은 산 속으로 ]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뿌리는 대지로 부터 끊임없이 받아 들이고 그 보상으로 꽃과 열매로써 대지에 되돌려 준다.

    낮은 밤이 받쳐 주기 때문에 밝고, 밤은 낮이 비워 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어둠을 이룬다. 

    물질만능의 덫에 걸린 현대의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우주 질서와 순환의 법칙을 깨뜨리고 있다.

    오늘날 심각해지고 있는 생태학적인 위기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지로 부터 끊임없이 빼앗기만 하지 아무 것도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대지는 서서히 볼모의 땅으로 되어 가면서 죽어 간다.

    이 지구가 죽어 가고 있다

    면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대지도 또한 죽어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독립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가난을 배워야 할때가 온 것 같다.

    분수 밖의 것에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에 만족하여 꿋꿋하게 살던 그 맑은 정신이 살벌하고 비정한 이 시대에 사람의 자리를 지켜 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인간의 대지]

     

    한쪽은 흙의 은혜마저 저버린 탐욕스런 배은망덕의 손이 있는가 하면 넉넉잖은 살림살이에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가슴을 여는 은혜의 손길이 있다.

     우리 이웃에 이런 손길이 있어 이 땅에 밝은 해가 오늘도 뜬다.

    [맑고 향기로운 인연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도리이고 인간이 도달 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다.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다면 추상적인 신이나 부처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을 통해서 그리고 보살핌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여러 종교가 번창하고 있는데 그 종교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 자비의 실천이 모든 신앙인의 일차적인 사명이고 또 종교를 갖는 이유입니다.

    종교가 일단 조직된 힘을 가지면 배타성과 집단 이기주의가 생겨 종교의 본질과 거리가 떨어지기 쉽습니다.

    각 종교는 늘 이점을 스스로 경계하고 신앙인들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마다 삶의 현장에서 이웃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종교인의 바른 현실 참여입니다.

    종교인의 뜨거운 신앙은 내면으로 심화 돼야지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내면으로 심화되지 못한 종교열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파괴력을 가질 수 잇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자기 종교의 잣대로 재려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종교로 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종교 없이도 사랑을 실천하며 바르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종교가 바라는 바입니다 [ 종교의 벽을 허물다]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 올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 사고와 가스중독 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라도 나를 쏠른지 알 수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 네 " 하고 선뜻 털고 일어 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침으로 여는 새벽, 정채봉을 기리다]

     

    자연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잘 보존하고 있다가 후손들에게 물려 줄 의무 밖에 없다.

    이 아름다운 산을, 자연을 파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 세계와 자연이 바라는 무소유]

     

    산하대지에 초록이 물들고 있다.

    살아 있는 무수한 생명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쳐내는 이 눈부신 봄날,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 같지만 이는 하나의 기적이고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뭐니 뭐니해도 이 세상에서 생명처럼 존귀한 것은 없다. 

    생명은 개체로 보면 단 하나 뿐이다.

    친지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와서 이와 같은 생명의 존엄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곳은 아니다.

    그 겉 모습은 다를지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어울려 산다.

    균형과 조화로서 생명의 연결고리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육체는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그 무엇으로도 죽이지 못하며 남을 죽이는 것은 곧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신성한 땀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걸어 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믿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과 기회를 준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의 도중에 잃어버린 초심을 되찾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 나는 누구인가 '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마다 나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 놓는 것.

     내려 놓음은 일의 결과나 성공과 실패를 뛰어 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 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 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살아 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고 천지과 순수로 돌아 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아는 것

      과거나 미래의 어느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 들인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행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 찾는 것.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 뿐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개체인 나를 뛰어 넘어 전체와 만나는 것.

      눈 앞의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 내 자신이 세상의 한 부분이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 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나는 것,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

      그것은 마무리이자 시작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하는 것.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자신을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단순해 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 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레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오늘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서 의지를 갖고 가야 자신의 삶이 개선된다.

    절에 사는 스님과 신도들은 저마다 삶이 맑고 향기로운가.

    그렇게 개선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절에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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