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늦도록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 둘이 있다. 한 사람은 눈을 감고 또 한 사람은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을 뿐이다. 회색으로 짙어 가는 도시의 황혼, 오후의 다방은 한결 조용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늦으셨는데...... 좋읍니까 ? " 여인의 눈이 남자를 본다. 이슬이 맺힌 눈은 어두운 고독이 잔뜩 깃들어 있다. 고개를 가만히 끄덕일 뿐이다. 남자는 다시 눈을 감는다. 감은 눈에 다시 떠오르는 것이 있다. 퍽 오래전에 이렇게 마주 앉은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그 예전의 모습이.. 세월이 무척 빠르다. 고 남자는 생각을 한다. 머리카락은 이미 반백이 다 된 것을 보면 지나간 세월이 그리 평탄치는 않았으리라. 다방 아가씨가 찻잔을 가지러 온다. 여인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아가씨를 보고 말한다. " 트래이메라이' 가 있으면 틀어 달라고 바깥의 어둠은 점점 짙어간다. " 트레이메라이" 가 조용히 흘러 나온다. 여인도 눈을 감고 옛날로 되돌아 간다. 밤을 새우며 편지를 썼던 그 시절, 첫 사랑이 노을처럼 몸서리 치도록 즐거웠던 순간을 ..... 다방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 온다. 하지만 오십이 넘은 두 사람은 아랑 곳하지 않는다. 다만 도취가 있을 뿐이고 예전같이 두 사람만의 안락한 꿈이 오가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쳐다만 봤지, 쉽게 알아내지를 못했다. 사랑은 인스피레이션일까 ? 두 사람은 서로가 거의 동시에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 아니냐는 듯 엉겹결에 손을 잡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만남 두 사람을 할말을 없었다. 이제 와서 서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적당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해후였기 때문이다. 삽십년만의 해후에서 이토록 몰라보기냐 고 다방을 찾으면서 두 사람은 심장이 고통쳤다. 이제는 어엿한 가정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캐어 보기에는 여간 쑥쓰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어느 순간에 서로 중 누가 먼저 사랑에 충실하지 못했던 까닭으로 결혼하지 못했다는 것을 짐짓 후회하고 있을 뿐이다. 후회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 무엇인가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어느 행복감 같은 것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한다. " 트레이메라이 " 는 끝이 난다. " 일어서시죠 ' 남자가 먼저 일어선다 . 여인도 가방을 든다. " 반가웠읍니다. 살아 계신 걸 알아서 .... " 여인의 이 말에 남자는 여인을 다시 본다. 그렇게도 그리워 보고 싶엇던 얼굴이었기에 시선를 못 박는다. " 즐거웠어요 ' " 어디에 살고 있느냐. 앞으로 만나고 싶다. " 그런 말한마디 없이 그냥 헤어져야 한다. 30년 후에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름다움일까. 그리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