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다림 [1978년 4 월 10일]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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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림 [1978년 4 월 10일]
    글/글쓰기 2011. 7. 12. 15:22



    사람이란 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항상 기다리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동물인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기다린다는 이 낱말 가운데는 한 없는 향수가 들어 있고 , 그리움이 들어 있고, 희망이 들어 있고, 아름다운 동심이 무지개처럼 황홀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말하자면 한 평생 허구한 날을 기다리면서 살다가 마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젖먹이 어릴 때는 어머니가 잠깐만 안 보여도 찾아다니고, 아버지가 나갔다가 들어 오실 때는 맛있는 것을 사 가지고

    올까 하고 기다리고, 조금 자라면 친구를 기다리고, 애인을 기다리고, 좋은 일자리를 기다리고, 행복하기를 기다리고,

    건강하기를 기다리고 이렇게 일생동안 기다리는 그것으로 한 세상을 끝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과거나 현재보다는 언제나 미래를 가슴 부풀게 바라면서 목을 길게 늘리고 발돋음을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아니

    겠는가.  이것은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말을 못해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씨알이 땅 속에 묻혀 기나긴 겨울을 지내면서 얼마나 봄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며 아름답게 핀 꽃송이가 먼 세월을 지난 다음 맛있는 열매가 맺어질 날을 동경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고,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고, 꽃피는 봄을 기다리고, 푸른 여름을 기다리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을 기다리고,  권력을 얻기를 기다리고, 공무원은 승진되기를 기다리고, 학생은 성적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딸은 시집가기를 기다리고, 아들은 장가가기를 기다리고, 전부가 기다리는 그것으로 인생살이는 빈틈없이 메워지고 있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이것을 어떻게하면 좀 더 멋잇게 궁색한 티없이 여유있는 자세로 남보기에 그다지 볼품없는 몰골이 되지 않도록 할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기다리고 있는 그 대상을 선택할 때 가장 나의 정도에 알맞도록 해야 할것은 물론이지만 그 속에는 격조 높은 것이 풍길 수 있도록 풍성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흔히 분수에 맞지 않는 대상을 골라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그만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을 우리들은 날마다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 나에게 있어 이 정도의 예상을 목표로 정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 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며 다음은 그 기다리는 태도에 대하여 녹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해도 다방 구석에 앉아 엽차나 마셔가며 담배연기에 얼굴이 노랗게 그을린 모양보다는 달무리 젖은 저녁 늘어진 수양버들 아래 하얀 옷깃을 여미며 다소곳이 서 있는 그것이 얼마나 품위 있고 격조 높은 기다림 이겠는가.

    남에게 돈을 꾸러 갔을 때도 모가지가 오그라지고 금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 보다는 씩씩하고 늠름하고 싱싱한 기상으로 활기 있게 말하는 그쪽을 더욱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다린다는 말은 구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인데 구하는 사람일수록 비겁하지 않고 여유있게 자신을 보여야 할 것이다.

    허리를 쭉 펴고 , 어깨를 올리고, 땅이 꺼지도록 힘있게 밟고 호흡을 길게 하고 푸른 공간을 멀리 바라보면서 솟아 오르는 태양 앞으로 한발한발 다가서는 그 사람에게 한하여 기다림은 빨리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던 간에 원리는 마찬가지일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넓게 우주를 바라보면서 기운찬 걸음으로 꿋꿋하게 전진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그 사람에게 멀리 기다림은 깃발을 펄럭일 것이며 눈부신 광명은 쏟아져 오를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의젓하지 못하게 비굴과 위축에 시들어진 그늘 속에서 열등의식과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에서는 절대로 생명력이 있는 기다림이란 오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큰 그릇이 아니고는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는 확실한 진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리는 눈이 크지 못하고 그 정신이 건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기다리는 정도에 따라서 나타나는 대상도 달라지는 것이다.

    송아지를 낚을 수 있는 낚시를 드리워 놓고 기다리면 송아지가 잡히고, 커다란 잉어를 낚을 수 있는 낚시를 드리워 놓고 기다리면 커다란 잉어가 잡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생이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크게 기다리는 습성을 가지도록 하자.

     

                                  1978 ,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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