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야산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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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산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전국의 유명 산 2009. 3. 2. 12:20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성주군 경계에 있는 산이며 높이는 1,430m이다.

    산 정상 봉우리가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렀으며, 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지달산·설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이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야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도의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가야산에서 따 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또 범어 '가야'는 '소(牛)'라는 뜻이기 때문에 가야산 정상(象王峰)이 소머리 형상이라 하여 우두봉이라 불리며 지금은 '牛頭峰' 표석도 세워져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고대(?-562)에 이 산을 정점으로 하여 동남쪽 낙동강 하류에 성산사야(星山伽倻: 성주), 대가야(大伽倻: 고령),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 고령가야(古寧伽倻: 함창?, 진주?), 소가야(小伽倻: 고성), 금관가야(金冠伽倻: 김해) 등 6개 가야국이 일어났 때문에 이 가야국에서 따 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가야산은 6가야의 주산으로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山神)이 가야산 상아덤(서장대)에 머물면서 천신(天神) 이질하(夷窒하)와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작은 아들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 되었다.

    금관가야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여 10왕자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居等)은 왕위를 계승하고 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서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7왕자는 허왕후의 오라버니 자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여 도를 깨달아 생불이 되었다.

    그자리에 칠불암이 있었다 전해지며 그 산봉을 칠불봉(七佛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국립공원관리소측 세워 놓은 가야산에 대한 설명 중에는 가야국 관련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 12대 명산의 하나이며 예로부터 조선 8경에 속하였다.

    주봉(主峰)인 우두봉(상왕봉)을 중심으로 암봉인 두리봉과 남산제일봉, 비계산·북두산 등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합천군 쪽으로는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지만 성주군 쪽은 가파르고 험하다.
    수려한 경치로 영남의 명산으로 꼽히고, 산중에 해인사를 비롯한 사찰·고적들이 많아, 가야산을 중심으로 가야산 국립공원이 지정되었다.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의 입구까지 이르는 4km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가을단풍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남산 제일봉(1,010m) 아래에 있는 청량사는 신라의 최치원이 지었거나 즐겨찾았다고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남산 제일봉은 1,000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불가에서는 천불산이라 부르고 있다.

    그밖에 산중에 삼원사지 삼층석탑(경북문화재자료 116)이 있고, 성주읍 방면으로 법수사지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86)이 있다.





    2009. 3, 1  07 : 00  제천 출발

                   10 : 10  가야산 백운동 주차장 도착

                               대부분 산악회 산행은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 같으며 입장료를 받는다고 현수막은 붙어 있으나 실제는 받지 않음




                                      백운동 주차장

                   10 : 15  산행 시작

     



                                      입구에 있는 식물원, 건너편에는 호텔이 있음

                   10 ; 20  국립공원 안내소 앞

     



    공원입구에서 직원이 친절하게 사진도 찍어 주고

     

     

     

                   10 : 30  백운 1교

                   10 : 40  백운 2교

     

     




    이러한 다리를 네개 건너

     

                   10 : 47  이정표

                              백운동 1,3km,  상왕봉 3,3km, 칠불봉 3,1km 119- 2

                   10 ; 47  백운 3교

                              백운동 1,6km, 상왕봉 3,0km,  칠불봉 3,1km,

                   10 ; 53  동성재

                               상왕봉 2,7km,  칠불봉 2,5km, 백운동 주차장 1,9km,

                   11 : 10  나무계단

     



                                      오르는 동안 내내 바위이 길이라 상당히 불편하지만 나무 계단이 있어 조금 나은 편

                   11 : 18   백운암지

     

     

                   11 : 17   사거리 안부

                              상왕봉 1,4km,  칠불봉 1,2km,  백운동 주차장 3,2km

                              이곳에서 상왕봉과 칠불봉이 보이며 급경사 오르막의 암릉 시작. 멀리 덕유산이 보임

     



     

                   12 : 17   이정표

                               칠불봉 0,3km  상왕봉 0,5km,  백운동 주차장 4,1km

     



     

                   12 : 30   칠불봉, 삼각점

    “가야산은 가야건국 설화를 간직한 해동팔경 또는 영남의 영산으로 예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하’에 감응되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칠불봉은 가야국 김수로왕이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金氏의 시조,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許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7왕자는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에서 가장 힘차고, 높게 솟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 후 도를 깨달아 생불이 되었다 하며 그 밑에 칠불암 터가 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예부터 산산이 머무는 가야산은 그 골이 깊고 수려하며 삼재(旱災, 水災, 兵禍)가 들지 않는 해동영지로 일컬어 온 영산이다.”

     

     

     


      가야산 칠불봉 정상석에 새겨진 전설이다.

                   12 : 40   상왕봉 가기 전 공터에서 점심식사

                               공터가 예전에는 넓었을 것 같은데 흙의 유출을 막기 위함인지 나무를 심어 놓아 여러명이 앉기에는 상당히 불편하다.

                               상왕봉 오르는 계단 바로 아래까지 가면 공터가 많고 바람도 없어 식사하는 자리로는 안성맞춤

                   13 : 15   식후 출발

                   13 : 20   상왕봉

     

     

                   13 : 30   1380m 지점

                                상왕봉 0,2km, 해인사 3,8km,

                                이 자리에도 단체로 식사하느라고 자리가 비좁음

                   13 : 48   석조여래입상 갈림길

                   13 : 56   헬기장

                   14 : 13   마애불입상 갈림길

                                마애불상 길은 입산금지 지역

                   14 : 30   이정표

                                해인사 1,9km, 상왕봉 2,1km

     



     

                   14 : 42   이정표

                                해인사 1,4km,  상왕봉 2,6km,

                   14 : 46   이정표

                                해인사 1,2km, 상왕봉 2,8km,

                   14 : 56   공원지킴터

                                마애불상 갈림길에서 내려오는 길이 이곳에서 만남. -- 그러나 입산금지로 막아 놓았음

                   15 : 03   해인사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곹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쓴인 나무는 산벚나무 등으로 ,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한번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손을 본 이 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 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오늘날 몇몇 경솔한 사학자들이, 칼과 창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는 대신에 대장경을 만들기에 힘을 쏟은 그때의 염원을 무기력한 시대사조로 그릇 되이 평가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하며,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한 것이다

     

     

     


                   15 : 35   해인사 버스 주차장

                                산행 종료

     

    가야산은 국립공원이지만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산이다.

     가야산 보다는 차라리 해인사 절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산행하면서 잘못된 생각임을 알았다.

    산행 내내 길이 좁아서 산행이 힘들 정도로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립공원이면서도 산이 크지는 않은 점이 약간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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