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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언제 필요할까글/생활 속의 신앙 2011. 4. 11. 19:32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 승에 가시어 사흘날에 죽은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 부터 산이와 죽은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30여년 전에 성당에 다니면서 배운 사도신경의 일부다.
그 당시 20대 때 일이지만 나는 이 사도신경의 글귀 하나하나를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또 한가지는 빵 5개와 고기 2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바다 위를 예수가 걸어다니는 성경 귀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인간으로 온 예수라면서 어떻게 인간이 신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그래서 교리공부를 다하고 신부님과 면담을 한 후 영세 받는 것을 포기했다.
신부님의 " 무조건 믿으라" 는 말도 이해가 안되었다.
이후 종교는 그 신부님 말씀대로 무조건 믿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구나 하고 이해하는데 20년이 더 지나서였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행복하게 살아 왔다.
부모님, 아내, 아이들 모두 아프지도 않고 속도 안 썩이고 집안에 우환이라는 것은 없이 그야말로 복 받은 사람으로 살아 왔다.
이런 나에게 종교라는 것이 필요할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나에게 종교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부모님, 아내, 아이들, 그리고 동생들 모두 다 성당에 다녀도 나만 다니지 않았다.
부모님도 아내도 성당에 다니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가끔 아내와 동생들이 "언제부터 성당에 갈거야" 하고 묻기는 했어도 강요는 안했다.
과연 신은 존재할까.
인간이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신들의 모양새도 가지가지다.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머리는 떨구고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부처는 빙그레 웃는 모습이 많이 보이고 중국 불교인 라마교는 배는 산만큼 나온 부처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힌두교의 몇 신은 손은 많이 달고 춤추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나보고 지금 가족과 관련이 없다면 부처를 택할 것이다.
얼굴을 숙이고 고통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보다는 빙그레 웃고 있는 부처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빤히 보다가 같이 한번 빙그레 웃으면 기분이라도 좋아지지 않겠는가.
10여년 동안 일요일이면 산을 다니면서 절을 많이 보아 왔다.
절은 대부분 산에 있으니까.
절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한번 같이 빙그레 웃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교회에 있는 십자가를 보면 웃음보다는 고통과 연민이 배어 나온다.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간다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 웃음기가 가시고 엄숙해진다.
산을 다니면서 또 한가지 배운 것은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신이 만든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하찮은 모래, 나무, 물이 흐르는 형태를 바라보면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울수가 있을까.
저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과연 신이 있어서 정말 신이 만들었을까.
요즈음 어릴 적 쓴 일기를 본다.
초등학교 때도 일기는 쓰기는 쓴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중학교 2 학년 부터 쓴 일기가 있다.
읽다가 보면 부모님이 싸운다던가. 집이 어려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능력으로 해 주지 못할 때 나는 하느님을 찾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느님을 찾으려고 한다.
찾는 이유는 내가 죽을 때까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여생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인생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릴 때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부모님에 의해 살았고. 젊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젊고 기운이 있을 때 나에게 신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신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바빴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신을 찾는 것은 바쁘게 살아가는 나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할일도 많고, 즐길일도 많은데 일요일은 신에게 내 주어야 하고 평일도 신에게 달려가야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지만 굳이 찾아 가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의 인생은 자식의 인생을 살것이다.
자식이 잘되면 내 인생은 편할 것이고, 자식이 힘들게 살면 나도 덩달아 힘들어질것이다.
그렇다고 자식들의 삶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 하느님 우리 애들 잘 되게 해 주십시요, 아프지 않고 돈도 많이 벌고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 하고 기도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어릴 때 하느님을 찾았고, 지금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하느님을 찾는 것을 보면 인간은 나약해지면 하느님을 찾는 모양이다.
반드시 자식들 때문에 종교를 가져야 한다면 억지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마음적으로 어디엔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젊었을 때 30년 동안은 신이 없어도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마음 속의 신은 필요할 것 같다.
신은 마음 속에 있다.
예수도 천국은 가슴 속에 있다 하고 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남은 나의 여생은 하느님과 같이 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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