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위안없는 고독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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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없는 고독
    글/생활 속의 신앙 2011. 1. 5. 16:33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지 2천년,  그 2 천년 동안 수 억의 신도들로부터 끊임없이 불려지고 있는 슬픈 이름이 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하는 카톨릭 기도문 중 의 하나인 사도신경에 나오는 " 본시오 빌라도" 라는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본시오 빌라도 란 대체 누굴까.

     

    그는 그리스도가 살아 있을 때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로마인 총독이었다.

    그는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온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

    하노라 " 고 거듭 말하며 그리스도를 놓아 주려고 하였지만 흥분한 유대인 대제사장과 군중의 뜻을 누르지 못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못 박기 위해 그들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결국 " 나는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다 "  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손을 씻으며

    물러났던 것이다.

    여기에 엃힌 또 하나의 이야기는 본시오 빌라도의 아내가 그 전날 밤 이상한 계시와도 같은 꿈을 꾸고 그 날 아침 재판석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급히 시종을 보내 " 그 의로운 사람, 그리스도를 해치지 말아달라 "  고 간청한 일이다.

    본시오 빌라도의 아내가 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알바 없다.

    그러나 신의 계시가 아닌 들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이 세상 끝까지 슬픈 원망의 기호처럼 불려져야 할 순간에 어찌 아내가 그 무서운

    비극의 전조를 예감하지 못하겠는가.

    그녀는 어떻게든 남편을 구하려고 했었고, 또 남편은 웬만하면 사랑하는 아내의 간청을 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너무도 이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불가항력적이었다.

     

    결국 그는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알고 있으되 의를 행하지 못한 자, 본의 아니게 의로운 사람을 십자가 못박아 죽게 한 자가 되어

    그로부터 2 천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미운 원망의 대명사처럼 입에서 입으로 세계의 구석 구석까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불려지

    며 부끄럽게 들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지상에 카톨릭이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하여 가는 한, 그 이름은 슬프고 원망스럽게 세계의 방방곡곡으로 울려 나

    갈 것이다.

    실로 그의 영혼은 지하에서나마 안주할 수 없는 평화를 빼앗기고 영겁의 채찍과 형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나는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알수 없는 오한에 가슴이 섬찍해지며 그때 그리스도를 재판해야 할 총독의 자리에 본

    시오 빌라도가 앉아 있었을까 하는 안쓰러움이고, 또 하나는 누군들 그 광분한 제사장들과 군중들의 노호를 누를 수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흔히 불운이란 말을 많이 쓴다.

    운이 없다든가. 재수가 없다는 정도의 뜻이겠지만 이 불운이라는 것이 대개는 불가항력적인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띠고 육박해 오는

    것이다.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라던가, 그때 그 차를 타지 읺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하는 식의 후회는 사실 나중에야 공연히

    뉘우쳐 보는 말일 뿐, 처음 일을 시작할 떄야 누구도 그것이 불행의 결과가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실 우리는 틀림없이 안다고 하면서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실수를 자주 저지르게 마련이고, 또 사실 그런 실수를 경험함으로

    써 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실수와 불운은 동질의 성격으로 때로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었는 불가항력일때가 있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때 본시오 빌라도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제 2 의 본시오 빌라도가 그 일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더라도 그와 똑같은 불운의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피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재수없는 불운을  공교롭게도 본시오 빌라도라는 사나이가 짊어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 천년 동안 더

    없는 악명의 사나이가 되어 영원히 잠들 수 없는 망령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주고 극형을 내렸다는 사실만이 기억될 뿐 왜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하는

    상황이나 심정같은 것은 기억될 수도 없고 기억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더욱 그리스도는 예언대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사흘날에 부활하게 되어 있었다니 어떠한 본시오 빌라도가 그 자리

    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내리게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본시오 빌라도야

    말로 신의 계획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불운의 희생자가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언제나 결과만이 분명하게 기록되는 법이다.

    상황이 조건이 아무리 불가피하고 정신적 고뇌가 얼마큼 컸다고 해도 그것은 이내 잊혀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결국 불운한 인간은 불운하다는 불행 이외에 누구에게도 동정 받고 이해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불행, 고독을 안게 되는 것이다.

    불운이란 버림받은 고독의 비애다.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거기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인간의 풀길 없는 고독의 아픔을 느낀다.

    우리는 누구나 다 조금씩은 그 속에 빠지고 있는 위안없는 고독을 ....,

     

     

     

        78년 부산대 약대 드래프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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