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질된 여가글/주변의 일상이야기 2007. 12. 7. 10:33
변질된 여가
사람들의 취미는 가지각색이다.
취미는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인간적인 本心이요, 삶의 탄력을 준다.
그러기에 사람의 취미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나 흘러갔다.
이 6년 동안 만난 친구들도 가지가지의 취미를 가지고 살아간다.
토목공학이 전공인 친구녀석이 바둑 기원을 차려 전공이 아닌 취미를 살렸느냐고 해서 한바탕 웃은적이 있고,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진 대대장을 지낸 녀석은 웅변협회 회장이 되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고 요리조리 약삭 빠르게 나대던 녀석은 집장사를 해서 한몫 보고 있단다.
결혼을 한 친구를 찾아 갔더니 그 동반자는 신체 한탄 비슷한 것을 하는데 휴일만 되면 등산이니, 낚시니 해서 같이 가자고 해서 가기 싫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는데 주일마다 그러니 수입도 변변치 않은데 미칠 지경이라고 하는데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친구 부인의 말을 듣고 여행이란 무엇인가.
요즈음 레저 붐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여행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별한 사연이 있어 문 밖을 나가기를 꺼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경우 여행이란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호주머니의 내력이나 하루하루 먹고 살 걱정 때문에 못 떠나고 있을 뿐이지 홀가분하게 떠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허구헌 날 되풀이 되는 따분한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느 무엇보다 즐거운 일일 것이다.
3등 완행열차가 좋다. 플렛트 홈의 조그만 자갈을 밟으며 멀리 떠나고픈 충동이 일 때 그 설레임은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이마에는 땀이 송송거리며 흐르는 노동 속에서 생의 창조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노동이 그치고 손을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편안히 앉아 이마의 땀을 옷소매로 닦는 여유로움도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지프스 신화를 생각해 보자
시지프스는 끝없이 바위를 산마루의 정상까지 올리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 바위를 굴려 올릴 때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할 것이고, 손은 거치른 돌을 받치느라 힘이 들어가고 피가 맺히고, 그리고 다른 곳에 조금만 정신을 돌리면 바위 치여 죽고 만다.
오직 바위를 정상까지 굴려 올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된다.
그 바위를 정상까지 굴려 올렸을 때 바위는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시지프스는 다시 산길을 터덜거리고 내려 와야 한다.
바위를 정상까지 올릴때를 노동이라 한다면 내려 올때는 여가, 휴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여가가 있기에 내려 오면서 길섶에 핀 조그만 꽃의 향기도 맡을 수 있을 것이고 온갖 신비한 자연을 구경하면서 내려 왔다면 이것이 진정한 여가를 즐길 줄 아는 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스가 그러지 못하고 굴러 내려가는 바위만 쳐다 보며 뛰어 내려 왔다면 그것은 노동의 연속이다.
그 곳에 여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외로운 형벌을 받는 것이 될 것이다.
“ homo faber " 란 라틴어 단어가 있다.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란 뜻이다.
사람이 게을러서도 안된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억만 장자가 일을 하지 않고 재산만 계속 파 먹어 들어 간다면 얼마가지 않아 정신적인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게으른 것도 사람된 도리가 아니지만 밤낮 없이 일만 하는 것도 사람이 할짓은 못된다.
조금 더 벌려고 몸을 깎는 일은 존경을 살만 하지만 도대체 일에만 재미를 느끼는 기계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들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여가를 즐기는 일은 관심 밖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와 사회의 진화와 발전에는 공헌하지만 자기 자신의 진화와 완성에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인생의 한 면이며 수단에 그쳐야 한다.
인간이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노동을 하고 쉰다는 것은 하늘의 뜻에 의해 정해진 사실이다.
그러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난 후 편안히 쉬라는 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피로를 회복하려면 노동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 여가를 가짐으로서 노동에 지친 육신을 풀며 노동에 대한 회의도 느끼고 그 가치도 재확인해 보고 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하는 무의식적인 內省도 있을 것이다.
즉 여가라고 하는 것은 일에서 해방되어 쉬는 일일뿐더러 동시에 일에 대한 정리의 시간이 되고 자기 완성을 위한 마지막 손질을 위한 시간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또 하나의 성스런 정신 작업 시간이다.
옛날에는 여행은 놀이였으나 요즈음은 하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100년전에 비하면 오늘날 얼마나 편한가.
정부는 정부대로 관광사업에 열을 올리고 민간단체에서 관광사업을 하여 신문 한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광고를 한다.
오늘날 여행은 이미 사라져 버린 예술품 으로 전락했다.
고속버스가 생겼을 당시 안내양은 철저한 여행안내인으로 군림했다.
조그만 小邑을 지날적에 여기에서 누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고, 그 부인의 이름은 뭐고, 자식의 이름은 뭐고 해서 아주 博學한 여행안내인 노릇을 한 것이다.
여행을 떠날때는 며칠동안 수선을 피워 준비를 한다.
옷, 모자, 선글라스, 가방 등 등을 준비하고 아울러 식사도구도 준비한다.
그리고 떠들고 놀 수 있도록 카셋트 녹음기도 잊지 않는다.
잠시동안의 휴식을 취하려는데 준비물 자체가 부담이 되도록 많다.
산이나 바다로 가 보라.
휴식을 취하려 하나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흔들어 놓는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들리면 귀가 솔깃해지련만 일상생활에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확성기 소리, 자동차 크렉슨 소리에 숨어 있는 우리가 여기서 해방되려 하지만 어디를 가나 해방될 수는 없다.
젊은이들이 떠들어대며, 고고를 추고, 광란적으로 발작한다고 매스콤은 문제를 삼고 있으나 지금 가서 쉴만한 곳을 찾아가 보라.
젊은이들보다 30대, 40대 여인들 거기에 남자 몇이 끼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빈 소줏병 속에는 숫가락 하나가 들고 온 천지가 떠나갈 듯 외치는 소리에 그 육중한 몸을 흔들어대는 모습은 젊은이들보다 기성세대가 더욱 많다.
어디를 가도 마음은커녕 육신조차 누일 곳이 없다.
자연을 찾아 바깥으로 나가면 이렇고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면 어떻가.
낮잠을 자고 싶으나 그것도 제대로 될리는 만무하다.
지나간 명작집,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싶으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여가를 즐기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면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 여가를 즐기는 것이 된다.
이 어찌 모순된 논리가 아닌가?
지금과 같은 시대의 여가는 비주체적이며 소비적인데로만 흐르는데 비극이 있다.
그래서 나는 밤의 휴식을 즐긴다.
밤이 고요하게 깊어가고, 하얗게 표백된 슬픈 마음이 있으면 고요한 밤에 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밤의 고요로움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한낮의 외로움, 고달픈 일도 모두 잊은 채 조용한 휴식을 모든 만물이 잠들어 있을 때 같이 갖는다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신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1979년 부산대학교 약학대학 드래프트지에 실린 글
'글 > 주변의 일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0) 2007.12.12 어느 하루 (0) 2007.12.07 진실한 삶 (0) 2007.12.07 아니벌써 (0) 2007.12.07 이름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됩니다. (0) 2007.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