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느 하루 :: 제천 감초당

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어느 하루
    글/주변의 일상이야기 2007. 12. 7. 10:34
     

    어느 하루

    어디라고 정하지도 않고 커피값 정도만 주머니에 넣은 채 집을 나섰다.

    온갖 차량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온갖 물건이 널린 시장 한 가운데를 비집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높은 건물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벗어나 조그만 숲속 공원으로 들어 갔다.

    아래로 보이는 조그만 건물은 크고 높다란 건물의 그린자에 가리워지고 동시에 내 시야를 가로 막은 채 버티고 있다. 

    도시 복판에 있는 공원이지만 숲속에 있다는 기분으로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내 폐부가 쉽사리 맑은 공기로 바뀐것처럼 내가 서 있는 이곳 공기가 맑을것이라 생각하며 자꾸자꾸 숨을 들이켰다.

    내뱉는 감각은 없고 오로지 들이쉬는 감각밖에 없다.

    앞을 걸어 가는 한쌍의 연인이 있다. 

    어선 한척이 고기잡이를 가는지 통통 연기를 내뿜으며 바다로 사라져 가고 있다.

    숲속에서 사냥이건, 바다속에서 사냥이건 즐겁기만 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냥하는 대상은 꿩이나 산비둘기만은 아닌듯하다.

     이미 일상생활을 해 나가기에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좀 더 돈을 벌기에 열중하며 바쁘게 돌아 다니는 돈벌이라는 것도 정말 매력있는 사냥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리어카 위에 잡동사니를 놓고 파는 여인을 보며 돈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에는 사업가도 많고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사람도 많다.

    한가지 한가지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즐거움, 물론 이러한 사업 그 자체는 세상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필요할 지 모르나 그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세상을 위하거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앞질러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수완을 보이고, 꾀를 부려서 근사하게 사업에 손을 뻗쳐 그것을 넓혀 나가는 유쾌함을 맛보기 위해서가 대부분 사업가 들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산보다 더 높은 저런 색이 바랜 건물을 지어 놓았지, 무엇 때문에 넓게 잡지 못하고 높게 지어 놓았을까.

    높은 위치에서 남을 내려다 보기 위해서 그들은 저런 높은 건물을 지어 놓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지어 놓은 건물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열중케하고 사업욕을 키울 것이다.

    옆 벤치에는 한쌍의 연인이 비둘기처럼 다정스럽게 사랑을 주고 받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며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사냥하는 것도 인생의 어느 정도 가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앞과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의리도 인정도 짓밟아 버리고 오직 쾌락만을 쫓아 다니는 것도 감미롭다고 한다면 지나친 역설이 될까? 

    계속하여 산골짜기로 길을따라 올라갔다.

    나는 지금 어느 위치인지 산의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만큼 올라 왔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지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고 그 꼭대기가 내 인생의 종착이 된다면 나는 꼭대기까지 올라가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과 먼 거리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머리 위에는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저기에 탄 사람은 나 보다 더 빨리 인생의 종착역까지 도착하고 싶은가보다.

    저 안에는 노인들만 타고 있을 것이다.

    노인 부부가 타고 이 산을 오르고 있는 등산객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대화를 나눌지 모른다.

      “ 여보! 절 좀 보오 거 돈 몇푼 내면 이렇게 차를 타고 산에 오를 걸. 왜 저렇게 땀을 흘리며 오른단 말이오 ---  쯧쯧쯧 “   안노인은 이렇게 받을거다

     “ 글쎄말요--- 저 젊은 사람인가 본대 굉장히 인색한 사람들이군”   노인 부부가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진정 행복하다.

     노인 부부는 나를 모르고, 나는 그 노인 부부가 모르는 나 나름대로 내일이 감추어져 있고 나 자신 혼자 생각하며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혼자 빙긋이 웃어 보기도 한다.

    휴게소에 다가 섰다.

    그 앞에는 뻘건 상처를 드러낸 다리가 없는 아주머니가 조그만  바구니를 앞에 놓고 쪼그리고 앉아 나를 쳐다 본다.

    너무나 동정 어린 그 눈에 현기증이 난다. 

    서양 어느 신사는 길가에 앉아 있는 거지를 지나치다 돈을 넣어 주려 했단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동전 한푼 없자 거지의 손을 덥썩 잡으며 

    “ 미안합니다.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서! 다음에 지날때는 꼭 보태드리리다.“ 이렇게 행동하자

    “ 아니오! 괜찮소! 내가 이런 생활을 수십년동안 했지만 당신처럼 손한번 잡아 주는람이 없었소! 정말 고맙소“  하며 대답하더라는 것이 생각난다.

    내 주머니에 얼마 안되는 돈이 남아 있다.

    던져줄까 하다가 주기 싫었다.

    따뜻한 인정을  신사처럼 주고 싶었다.

    손을 잡아 주고 그 신사처럼 행동하려 했다.

    그러나 때가 꼬장꼬장 묻은 손과 얼굴, 벌건 피가 맺혀 있는 다리를 내놓고 있는 것이 나를 주줌하게 만들었다.

    얼마의 시간을 두고 그 불쌍한 아주머니 앞에서 망설였더니 오히려 아주머니가 수치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사람이 병든다는 것, 이것도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옆에 누가 있다해도 그것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건강하지 않으면 세상만사가 다 소용 없어진다. 

    쾌락, 행복, 보람,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건강하지 않으면 생명도 가치가 없을지니 건강은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조금전에 케이블카를 탔을  것 같은 노인 부부를 생각했다.

    그 노인 부부가 젊었을 때 나는 어린애, 아니면 태어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고통의 세계라 한다.

    고통의 세계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 듯이 어린애는 태어 날 때 울기부터 한다.

    그럴 때 거꾸로 생각해서 어린애가 태어나자 마자 생글거리고 웃기부터 한다면 이 세상은 환희에 찬 세계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나 같으면 방정맞다고 볼기짝을 때려 줄 것 같다.

    지금 이 거지를 보면 고통의 세계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옆의 절간으로 들어 갔다.

    커다란 구덩이에 빠지려던 젊은이가 간신히 칡덩굴을 잡고 있다.

    구덩이 바닥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잡고 있는 칡덩굴은 새앙쥐가 갉아 먹고 또  그 위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이 그림이 이 세계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혼자 왔다가 쓸쓸히 혼자 떠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외로움을 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할진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나의  미성숙 때문일까!

    산을 내려와 극장엘 들어 갔다.

    영화가 슬프다. 말이 없는 영화, 말이 필요 없는 영화다.

     그러나 그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의 심금을 울리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죽은 사람을 땅을 파고 묻는다. 

    묘지의 조그만 구멍에 혼자 들어 간다.

    죽는다는 것은 고독한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준엄하고 숭고하고 고고한 고독이다. 

    순수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고독이다.

    생존 속에서 보다 더욱 더 고독한 고독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 순수한 마지막 고독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되어  늙어지면 그 젊음과 함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또 구름과 같은 사람들의 칭찬도 다 옛일 이 되어 버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홀로 바라볼 때 마음에 다가 오는 생각이란 “고독하다” 는 것일게다.

    극장안의 불이 켜지고 나는 사람들을 둘러 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 

    정말 고독하고 외롭구나 싶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한 번 만나기 위해서 는 전생에 3천번을 만나야 한다는 논리가 이래서 성립하는 가보다.

    길을 가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맞잡고 이야기까지 한다면 이거야 말로 지극한 인연중의  인연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만남과 아울러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 주셨다 하더라도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다.

    제일 처음 만난 것은 어머님이지만 만나자마자 여태까지 헤어지는 연습을 해 온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가 아름다운 얼굴에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다해도 시간이 되면 헤어져야 하고 이 슬픔속에 또 다시 외로움과 고독을 맛보아야 한다.

     이 고독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같이 만나고  있는 시간만이라도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줘야 할 것 같다. 

    이와같이 기쁘게 해 줄 대상이 나에게 있고 그 시간이 오래하면 할수록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지금 집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낯이 익은 한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일일까!

    낯이 익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한 번이라도 본듯한 사람이라면  말을 걸어 보리라.



                1983년 약사공론 수필 란에 실린 글임



    ' > 주변의 일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이 산다는 것은  (0) 2007.12.25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0) 2007.12.12
    변질된 여가  (0) 2007.12.07
    진실한 삶  (0) 2007.12.07
    아니벌써  (0) 2007.12.07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