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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삶글/주변의 일상이야기 2007. 12. 7. 10:32
진실한 삶
人生은 登山과 같다고 한다.
登山客들이 山에 오르듯이 사람은 自己의 삶과 目標를 향해 걸어간다.
사람마다 目標가 다르고 方法이 다르다.
科學者는 위대한 발명으로, 藝術家는 뛰어난 作品으로, 政治家는 나라의 發展으로, 企業家는 우수한 製品으로 自己 꿈을 實現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偉大한 人物이 될 수는 없는 法이고 해서 나는 분수에 맞는 目標를 세워 꾸준하고 착실하게 오늘을 살아가자고 생각을 해 왔는데 요즈음 世上 돌아가는 것은 나를 가 만이 놓아 주지 않는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뛰다가 중간에서 늦잠을 잔 토끼는 느리지만 쉬지 않고 계속 달려간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그런데 요즈음 토끼에 대한 또 다른 現代版 愚話가 생겨났다.
시골에 사는 토끼와 개미가 서울로 나들이를 갔다.
길가에는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보기만 해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토끼와 개미는 30층 되는 건물을 택해 옥상까지 누가 빨리 올라가나 내기를 하였다.
토끼는 옛날의 거북이에게 진 것을 개미에게 만은 지지 않으려고 쉬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뛰어 올라 갔다.
그러나 토끼가 30층 옥상위에 올라갔을 때 개미는 한숨 잘 잤다는 듯이 하품을 하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반기는 것이 아닌가.
토끼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토끼 자신은 먼저 올라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개미는 이미 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진 것을 개미에게만은 설욕하여 자신의 우수함을 과시하려 했던 토끼가 또 다시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튼튼한 뒷다리만 믿고 뛰어 오른 토끼의 뜀박질, 지난번의 패배를 거울삼아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역시 패배였던 것이다.
상대가 거북이가 아닌 개미로 바뀌었다는 것과 자신이 20세기 과학문명의 한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개미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의 발에 붙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가치가 뒤섞여 있고 변질되어 있다.
성실하고 꾸준한 것을 상징하던 거북이는 우선 그 속력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들의 우화에서 빠져 나갔고 부지런하고 근면함을 자랑하던 개미는 엘리베이터에서 곡예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토끼는 무엇인가 늘 재치있고 발랄하기는 하되 결국 실패자의 오명을 벗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가는 먼 옛날의 거북이,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열심히 뛰는 토끼, 요리조리 요령과 기회만 노리는 개미,----
나는 이 이야기에서 토끼가 될 것이냐, 아니면 거북이가, 아니면 개미가 될 것이냐를 놓고 혼란 속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되었고, 내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또 나 자신의 성격은 어떤가 하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다.
거북이가 되자니 너무 태평스럽고 늙은 것 같고 토끼가 되자니 바보같이 보이고, 개미가 되자니 기회주의자가 될 것 같아 아무것도 마땅한 것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어떤 해답도 얻지 못하던 차에 버스 안에서 해담을 얻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그 손결도 각자 다르다.
버스 손잡이에 매달린 손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손톱 화장이 짙고 흰 손을 가진 여인은 대개 만원버스에서 엄살이 많고 좌석차지에 혈안이 된다.
그러나 어쩌다가 발 등을 세게 밟혔어도 비명조차 내지 않는 여인의 손은 햇빛에 잔뜩 그을리고 투박한 게 보통이다.
큰 보따리를 지고 행상하는 아주머니나 촌티가 나는 아 낙네의 손에서 흙의 정취가 서려 있고 생동하는 自然을 손에 듬뿍 담고 있는 것 같아진다.
또 허름한 바지춤을 연신 끌어 올리면서 서투르게 매달린 농사꾼 차림의 손은 거북이 잔등 같지만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의 마음을 너무나 당혹케 무안하게 만들어 놓는다.
눈을 감아도 농사일에 피곤해 있고 그들의 지친 모습이 뇌리에 파고들고 방금 본 빨간 매니큐어의 긴 손톱이 얼굴을 긁어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정다운 손, 미운 손은 얼마든지 있다.
백년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의 고사리 손, 사랑하는 여인의 매정한 듯한 손길, 이러한 것들은 생각만으로도 정답고 따뜻하고 더 오래 잡고 싶은 손인데 반하여 못된 친구가 찾아와 내미는 악수, 눈치부터 배우는 미운 아이들의 손, 권세와 명예에 듬뿍 절은 살찐 손들, 이러한 것들은 잡기조차 부끄러운 손들일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당한 無顔을 오래오래 숨겨둘 수 있을지언정 자기 자신에게 마저 숨길 순 없다.
세상에는 조그만 수치도 감당하지 못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있고, 온 세상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하고, 침을 뱉을 몹쓸 짓을 하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후안무취의 위인도 있다.
나는 누구나 다 아무런 부끄럼 없이 잡을 수 있는 손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진실 된 삶을 전개 했느냐 도 반문해 보았다.
眞實로 永遠한 것, 眞實로 絶對적인 것은 끝내 人間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物質的인 것, 肉體的인 것들이 갖는 그것보다는 봄 더 永久한 生命을 지닌 價値를 實現함이 不可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人間은 現在가 克服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믿는 까닭에 나는 삶에 대한 憧憬들을 斷念할 수 없을 것 같다.
斷念하지 않기 위해서 토끼가 되고 싶어졌고 진실되게 살고 싶어서 토끼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남 앞에 떳떳하게 내 손을 내밀고 싶었다.
옛날의 시합에서 진 것을 설욕하기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 오른 그 토끼 마냥 나는 내 삶을 한 계단 한 계단 진실 되게 살고 싶어지는 게 나의 심정이다.
거북이가 되기에는 아직 젊으니까
1978년 부산대학교 효원지에 실린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