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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족이야기/어머니와 아버지 2007. 12. 7. 10:02
어머니
오늘은 어버이 날.
그렇다고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다.
애들은 벌써 다 커서 결혼 시킬 때가 다 되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직 큰 탈 없이 건강하게 계신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를 생각하면 죽는 순간까지도 너무 얌전하게 살다가 가신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아버지를 아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법 없어도 사시는 분” 이런 소리를 수 없이 들어야 하였다.
남에게는 이런 소리를 들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는 무능력자가 아니었나 한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쉼 없이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들과 비교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가 남자라면 어떻게 할텐데....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 어떻게 확 할꺼라는 둥 소리를 질러 옆에 있는 내가 가슴을 졸이고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너무 얌전하게 살고, 어머니는 너무 거칠게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 어린 내 마음에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고 욕이 아니면 회초리를 들었던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지 않고 계모로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면 “ 네 엄마는 다리 밑에 산다” 고 할 적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는 어머니를 찾으러 철다리 밑으로 갔으니까.
그것이 재미 있어서 동네 어른들은 나한테 더욱 더 그런 장난을 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억은 너무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도 어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 입학하면서 방학 때만 되면 단양의 삼촌 집에 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장손자가 보고 싶어서 방학만 되면 데리고 갔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두려운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안정을 찾았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7 ~ 8 살 때는 엿을 고아 만들고, 기계떡을 남들어서 제천에서 태백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팔러 다니셨다.
한번 만들어 놓은 엿을 아버지랑 나랑 같이 전부 먹었다가 둘 다 어머니한테 무척 혼이 난 적도 있다.
그것을 팔아야 온 집안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데 그것을 흔적도 없이 먹어 버렸으니 오죽이나 화가 났을까.
그 이후 두부를 만드는 것을 배워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셨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두부를 만들기 시작하면 3판 정도 [60모] 정도를 만들어서 오후에 리어카에 싣고 시장에 나가 팔아 집안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반면에 아버지는 논 1500평 정도, 그리고 밭 600평 정도는 먹고사는 것도 모자랐으니까 모든 가정의 생활비 어머니가 책임을 져야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두 분이 싸우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어머니의 수많은 푸념을 들어야 했다.
약 10년 정도 되었을까.
대구 사는 셋째 동생 찬숙이가 편지를 보내 왔다.
그 내용 중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고 딱 한 구절 “ 어릴 때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지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에 찌들고 힘들게 살면서 그 분풀이를 우리에게 한 것 같다. 이제와서는 왜 엄마가 그랬는지 이해할 것 같다” 는 글..
그 이후 나는 어머니에게 정을 붙이려고 많이 노력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욱박 지르는 말 투, 타협할 줄 모르는 말투, 정이 끊어지는 말투 ... 또 다른 많은 것들이 정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다행인 것은 집사람은 어머니와 너무 살갑게 지낸다.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잘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 다정스럽다.
그것으로 나는 대리만족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