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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구간[댓재 -두타산 -청옥산- 백복령]우리의 아름다운 강산/백두대간 [완료] 2008. 1. 11. 11:21
제 26 구간 [댓재 - 백복령]
아침에 일어나기 힘이 들 정도로 몸이 무겁고 아프다.
20분 정도 더 누워서 빈둥거리다 5시 반에 일어나 목욕탕으로 향한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몸의 무거움이다.
어제 비는 오고 날씨가 습이 많아 온 전신을 짓누르는데 엄청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다.
이번 구간을 종주하면서 복성이재에서 육십령까지 오는 구간과 아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원재에서 복성이재에 도착했을 때 육십령에서 복성이재까지 온 대전팀들이 있었다.
먼저 도착한 팀과 늦게 도착한 팀과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는 것 같다.
왜 같이 안 다니고 따로따로 각자 흩어져 다니느냐 했을 때
“ 이제 다 왔는데 뭐가 걱정이냐. 알아서 잘 찾아온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다음번에 올 때 반바지, 짧은 옷 절대 입지 마세요”
했던 기억이 난다.
진짜로 다음번 구간은 그야말로 엄청 험했다.
우거진 잡목과 잡풀이 앞을 가리고 가시덤불을 왜 그렇게 많던지.
그런데 이번 구간에도 대전팀들이 같이 따라다니고. 구간 길이도 복성이재에서 육십령구간하고 비슷하고 험하기도 비슷하다.
무슨 빌어먹을 잡풀은 그렇게 많고 삐죽이 튀어나온 잔가지는 온 전신을 찔러대기 바쁘고 우거진 수풀에 앞은 보이지 않고 그야말로
고역스런 구간이다.
지금 수많은 구간 중에 이제 몇 구간 남지도 않았다.
지금 쯤 "각자 알아서 앞으로 "할 때도 되었음직한데 흩어지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 부담을 덜 느낀다.
솔제니친이 쓴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 보면서 어떻게 하루에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소설책 한권을 쓸 수 있을까. 대단하다 하고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일기를 적을 때면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심정으로 적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노트 2장을 넘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부터 어제 하루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한번 적어 볼까 한다.
2004. 06. 24
22 : 40 집에서 출발
25 03 : 20 댓재 도착
03 : 30 댓재 출발
05 : 55 두타산
07 : 50 청옥산
09 : 00 고적대
10 : 00 갈미봉
12 : 30 상월산
16 : 25 백복령
22 : 30 집에 도착
오늘도 어김없이 차는 종주 시작점에 섰다.
새벽 3시 30분
아직 주위는 어둡지만 어둠 위로 쌓여 있는 운무가 춤을 추고 있다.
댓재를 출발하면서 산신각이 있었는데 언제 지나쳤는지도 모르게 아주 급하게 시작부터 오르막을 친다.
1년 전 5월에 지역산악회에서 두타산 안내산행을 하는데 따라 나섰다.
산행의 처음 시작인 것이다.
준비하느라고 멀리까지 가서 등산화, 등산복을 샀다.
복장을 차려 입으니 산악회 화원들과 산행을 하여도 별로 표가 나지 않아서 기분도 좋았고, 더욱 기분이 좋았던 것은 산에 매일
다닌다는 산악회 회원들이 나 보다도 더 비실거리고 못 걷는 것이다.
댓재방향 마루금과 운해
별로 힘도 안들이고 두타산 정상에 제일 먼저 올라갔다.
그 당시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힘이 들어 골탕을 단단히 먹었다면 지금 백두대간 종주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텐데 가장 먼저
올라갔다는 그 오만이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서 있도록 만든 것이다.
또 버스에서 지금 서대장과 상호가 타서 백두대간 종주 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저거 한번 해 봐 별거 아니겠지 뭐 하는 생각, 그리고 솔직히 그 당시는 백두대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차도 몰랐다.
원주에서 오리엔테이선 할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합쳐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알았지 무얼 알았겠는가.
이 당시 샀던 옷과 등산화는 백두대간 종주 시작한지 5구간을 지나지 않아 찢기고 떨어져 입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대간 종주를 하게 된 원인은 그 당시 두타산 등반을 따라 온 인연 덕분이었다.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산행 초입에 1년 전에도 토사가 흘러 내리지 못하게 철망이 처져 있었는데 그것은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른 것은 그 당시는 훤한 대낮이라 밑의 도로와 절개지를 보면서 지나갔는데 지금은 어둠 속이라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새벽하늘을 가르는 총소리에 놀라고
처음 시작이 가파르더니 내리막도 역시 급하다.
돌이 많고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더욱 미끄럽다.
아직까지는 예전의 기억이 어둠 속이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1021봉에서 바라보는 두타산은 부드럽게만 보인다.
언제 날이 밝았는지 이슬을 머금은 산들이 벌거벗은 아기들의 포동포동한 모습 같다.
어디서 들려오는 총소리인지는 몰라도 전장의 한 복판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총소리가 짐승을 쫓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도 하는데 지나는 사람은 불안하기 그지 없다.
누군가 멧돼지 잡느라고 총을 쏘고 있는지 누가 알리요.
목통령에는 산죽이 가득하여 그 속으로 들어가면 전혀 찾을 길이 없어라.
댓재에서 대간 능선을 타지 않으면 이리로 바로 편하게 올 수 있는 길도 있는데 그 높은 산을 무슨 연유로 오르락거리는지 원.
목통령을 지나면 아주 급한 경사가 가로 막고 있는데 이제는 이 오르막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으니 나도 산에 다니는 근육은 어느
정도 생겼나보다.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양 갈래 길이 나온다.
1년 전에는 밑의 길로 갔었는데 그리로 갈까 했지만 앞에 가는 김영길 어르신이 위로 가고 리본도 그리로 달려 있어 윗길로 향한다.
1243봉 정상에는 무슨 큰 묘가 있는데 후손들이 정리는 하는 모양인데 묘 주위를 싸고 있는 돌이 삐딱하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하다.
여기서 두타산 정상까지 철쭉 숲 속을 지난다.
두타산 정상에서 다람쥐랑 놀고
두타산 정상에는 표지석이 있는데 정상적으로 있지 않고 누가 힘도 장사지 한바퀴 획 돌리는 것도 모자라 한 쪽 구석으로 치워 놓았다.
김진선 강원도 도지사가 기념 식수 했다는 주목은 어디로 가고 기념 식수 했다는 표지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빌어먹을 도지사가 무슨 대수라고 기념 식수 했으면 나무에다 조그맣게 하나 만들어 표지를 해 놓으면 되지 나무 한그루 심어 놓고 저
무거운 표지석을 만들어야 하나 싶다.
저 표지석 만드느라고 직원 품 10품은 더 팔아야 하지 않을까.
아침 식사 하는 도중에 다람쥐가 앞에 와서는 도망가지도 않고 같이 밥 먹자고 대든다.
다람쥐가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놀아 본 모양이다.
저 보다 더 큰 빵 한 개를 입에 물고는 저희들 집으로 가 버린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 한다.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청옥산은 눈앞에 있건만
두타산 정상에는 리본이 여기저기 하도 많이 달려 있어서 청옥산으로 향하는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정상에서 청옥산은 바로 눈앞에 있으나 능선을 타는 줄 알았더니 밑으로 한참 내려 갔다가 다시 한번 올라야 하니 전혀 쉬운 코스가
아니다.
박달령을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올라온 등산객을 만난다.
강릉에서 왔다는 산악 마라톤 주자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선다.
전부 작고 뼈만 남아 있는 모습이 몰골이 별 것 아니지만 삽당령까지 뛰어 간다는데 걱정된다.
반바지 차림에 조그만 배낭을 매고 옷은 깨끗한데 저런 차림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청옥산 오르는 길에서는 뛰지도 못하고 겉는 것들이 저런 비쩍 마른 체구로 체력이 안 되어서도 못 갈 것 같다.
청옥산 정상 바로 전에 샘터가 있다.
청옥산 샘물
대간 길에서 2분 거리이고 물은 금방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시원하다.
청옥산에서 이어지는 마루금
청옥산 정상 헬기장 주변은 숲이 너무 우거져 헬기장으로의 역할은 못 할 것 같다.
청옥산 정상에서도 표지판을 잘 보고 독도에 주의해야 한다.
청옥산에서 연칠성령으로 내려가는 길에 뒤에서 자꾸 길을 재촉한다.
50은 약간 넘어 보이는 내외의 발걸음이 아주 급하다.
댓재에서 5시에 출발했다는데 벌써 우리 뒤를 따라 와서는 길을 채근한다.
삽당령까지 간단다.
글쎄다.
여하튼 존경스럽다.
짐도 무겁게 지지도 않았고 발걸음도 가볍다.
연칠성령에서 두타산까지는 등산객들이 무척 많다.
대간 종주 하는 사람들 잘못하여 그 사람들 뒤를 따라 갔다는 종주 종 칠게 분명하다.
앞으로 이 부근을 등반 하려면 무릉계곡에서 연칠성령으로하여 청옥산 두타산을 거쳐 무릉계곡으로 다시 내려 가는 길이 제대로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면 약 10 시간 정도 걸리니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닐까 싶다만.
고적대 마루금
고적대의 아름다움이여
연칠성령을 지나면서 다른 등산객들이 존경스런 눈초리로 쳐다 본다.
등산객들이 많으면 이런 대우도 받는구나.
앞에 커다란 산이 하나 나타난다.
“저기도 넘어야 돼”
“아마 그럴 걸”
지금까지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을 넘지 않은 적이 있던가.
고적대를 오르는 길이 바위가 경사가 급하고 무척 험하다.
겨울에는 도저히 지나지 못할 길이다.
특히 고적대 정상에는 흙을 밟을 수는 없고 큰 바위등을 타야 한다.
잘못 디디면 추락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정상에는 사람 서너명 서 있으면 뒤로 돌리지 못할 정도로 좁다.
조망터에서 본 고적대 뒷편
정상에서 갈미봉으로 향하는 길은 한 두시간 전에 공사를 한 것 같다.
나무 톱밥도 금방 떨어진 것 같고 깔아 놓은 흙도 마사토를 금방 뿌려 놓았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처음 지나는 기분이 든다.
갈미봉 쪽 능선의 아름다운 바위와 그 밑에 어우러진 운무가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경치는 처음 보는 느낌이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우와 ! 하는 탄복의 소리
백복령에서 출발한 팀과 만나다.
새벽 2시에 출발했다니까 아직 우리는 반을 채 못 온 셈이 된다.
앞으로 40분 정도 더 가면 반은 가지 않을까 싶다.
아마 갈미봉을 가야 반 정도 가는 모양이다.
고적대를 내려오면서 바라 본 바위산 세 개는 막상 그 부근을 지날 때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야말로 멀리서만 바라 볼 때 예쁘게 보이는 미인이다.
고적대에서 갈미봉은 보이지 않는다.
고적대에서 산 밑으로 보이는 비포장도로가 있는데 저 길이 이기령으로 또 원방재까지 연결된다고 하니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그 길로
가도 좋을 것 같다.
무릉계곡 운무
두타, 청옥 방향 운무
갈미봉에 내리는 비
갈미봉 오기 전에 지도상으로는 무릉계곡이 아주 잘 보임직한 지점인데 밀려오는 운무 때문에 구경은 못하고 잠깐 앉아 쉬는데 구름의
모양이 금방 비라도 퍼부을 태세다..
왠걸 갈미봉 정상에 서자마자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모두들 비 옷 챙기라, 배낭 덮개 씌우랴 바쁘게 움직인다. 배낭 속에는 별 것 안 들어 있는데 왜 그것 씌우느라 난리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남이 씌우니까 씌우는 거다.
그 속에 귀중한 것 들지도 않았고 비 맞아 보아야 망가질 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 전부 씌웠는데 혼자 안 씌우면 저 자식 엉터리 같은 놈
이라 할까봐 그냥 따라 씌우는 거다.
갈미봉에서 이기령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이기령의 비포장도로는 백두대간의 선상과 나란이 있다.
벗을까 말까
이기령에 도착하기 전에 널찍한 장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많이 흘렀고 어느새 비는 그쳤다.
전부 옷을 벗어 나무 위에 걸쳐 말리기 바쁘다.
이기령에 도착 했을 때는 비는 아예 볼 수가 없고 햇빛만 쨍쨍 내려 쬐고 있다.
“어이 우리 이거 벗을까”
“조금 있다가 벗지 뭐”
“지금 벗어. 물기도 없잖아”
“그래도 누가 알아, 비가 또 더 올지”
“비가 한 시간은 더 퍼부어야 성능 실험을 할 텐데 이 빌어먹을 비가 장난치나”
잠시 후 그들은 길다란 스패취를 언제 벗었는지 벗고는 가벼운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스패치를 입고 성능 시험하려다 비가 조금 밖에 오지 않는 바람에 성능 시험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옷은 입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더이다.
970봉에서 상월산까지
상월산에서 보이는 엄청나게 큰 바위
이기령을 지나 봉우리 하나에 올랐더니 길안내 표지판에 아직 길안내는 작성되지 않았건만 누군가 펜으로 상월산으로 써 놓았는데
여기는 가짜 상월산이다. 970봉을 누군가 힘이 들어서 여기였으면 하고 써 놓은 것 같다.
상월산을 힘차게 올라 간다. 모두들 숨도 안 쉬고 올라간다.
“우와 ! 가스가 엄청 밀려 온다”
“무슨 가스가 어디서 밀려 와”
“여기 구름이 엄청 밀려 오잖아”
“에이 나는 또 누가 방귀를 뀌어서 그 가스가 밀려 온다고 이야기 하는 줄 알았잖아”
“괜히 참았네” 그러더니 “붕붕붕붕” 아주 요란스럽다.
상월산 비탈진 길 20분 정도 숨도 안 쉬고 오르려니 자동차 가스 빠지듯이 사람도 뒤로 가스를 붕붕 빼야 앞으로 추진력이 생기겠지
나는 아닌데 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은 다음번 구간에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절에서 삼천배를 할 때 삼천배를 넘어가면 일어설 적마다 붕붕 거려 뒷 사람 미안해서 삼천배를 못하겠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원리와 똑 같지 않을까
상월산 정상에는 아주 큼직한 소나무가 반가이 맞아준다.
나무를 산 모양으로 잘라 그 판에 상월산이라 표지를 해 놓았다.
상월산에서 원방재로 향하는 오른쪽 경치가 아름답다.
지금은 구름이 많아 구름 속의 경치라 아름다운가 몰라도 날씨가 맑으면 맑은대로 훨씬 더 아름다우리라
왜 다시 되 돌아갈까
원방재에는 고적대에서 보였던 길이 여기까지 연결되어 나타난다.
원방재에는 리본이 무당집보다 훨씬 더 많이 달려 있다.
오늘 산행 구간 중 가장 저지대[720m] 에 서 있다.
나무 판자에는 백복령 2시간 30 분이라 되어 있지만 지도 상에는 3시간 30분이다.
상월산을 내려오면서 건너 보이는 산을 오르는가 했더니 무슨 산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자꾸만 동쪽으로 향한다.
대체 보였던 산을 오를 생각은 안하고 계속 동쪽으로 진행한다.
만약 혼자 간다면 길이 잘못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동쪽으로 향한다.
산죽 숲도 지나고 1시간 정도를 진행하면 1022봉에 도착한다.
헬기장이 있고 잠시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또 다시 비가 퍼 붓는다.
전부 재빨리 비 옷 입고 준비 태세를 갖춘다.
빗속에서 마지막 힘을 쏟으며
1022봉을 내려 서면서 누군가 표지 해 놓은 빨간 리본은 242번이다.
30 보 마다 번호 한개씩 부여 했다면 약 7000보를 더 가야 된다.
약 4km 이상이 될 것 같다.
이 계산대로라면 앞으로 가야 할 시간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 될 것 같다.
이 빨간 리본은 도솔봉에서 죽령 내려 올 때 보았다.
이것이 무슨 표시일까 해서 발자국 숫자를 세워 보니 평균 30보 마다 하나씩 표지를 해 놓은 것 같았다.
실제로 실측을 해서 표시를 했는지 발자국 숫자로 했는지 그것은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실측을 하기 위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 "백두대간 등산로 정비계획번호표" 란다.
진부령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모양이다.
이 번호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며 이제 얼마 남았네 이제 얼마 남았네를 셈하며 빗속을 뛰다시피하여 크게 힘들이지 않고 백복령에 도착하다.
장장 13시간 30분의 긴 여정이다.
15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을 많이 단축했다. 날씨가 더웠으면 가능했을까 생각해 본다.
백복령에서
백복령에는 천막을 쳐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비가 억수로 퍼붓고 하여 그 안에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자 하였으나 주인은 못하게 한다.
싸가지 없는 주인 같으니라구
그 안에 보니까 나무로 깍아 만든 장식품도 있던데 그것이 산에서 허가없이 베어다가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앞 공터에 차도 세우지 못하게 하고 배낭 식탁에 올려 놓았더니 식탁 젖는다고 난리치구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복작거려야 그 집이 흥하거늘 어찌하여 오는 사람도 내 쫓는가.
요즈음 젊은 사람들 지덜 부모가 잠깐 오는 것도 귀찮다고 하는데 그 빌어먹을 집안 꼴 잘 되겠다.
중생들아 집에 찾아오는 온갖 미물도 내모는 법이 아니거늘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들락거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이번 구간은 31km 나 되는 거리로 난이도도 심한 구간이다.
긴 오름 그리고 잡목이 많아 많은 체력을 요하는 구간이다.
처음 먹어 보는 문어
예전에 술집에서 술안주로 나온 것이 문어 말린 것을 먹어 본 적이 있다.
질기고 맛이 전혀 없다.
이런 것을 무슨 맛으로 먹나 싶고 그 이후로 문어는 입에 댄 적도 없다.
예전에는 임신이 안 되는 여자들한테 팔 8개 달린 문어를 먹는다는 기록을 본적이 있다만....
덕산재에서 처럼 차라리 오징어무침을 먹으면 침이 돌 텐데 하고 기대를 했다.
그런데 입안에 넣는 순간 오징어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오징어도 먹어 보았지만 문어에 비하면 상당히 질겼다.
문어가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정숙이 누이의 음식 솜씨는 기가 막히다.
참깨 한 봉지는 그대로 있던데 말이다.
참깨 한 봉지까지 다 털어 넣었으면 훨씬 더 고소할텐데 아쉽기 만하다.
비가 내리는 산 속을 아쉬움을 남긴 채 벗어나다.
피곤하다.
어제 잠 한숨 자지 못한 것이 피로를 몰고 온다.
고속도로에서 예고 된 날벼락이 떨어진다.
아이스박스를 봉고차 지붕에 얹었다.
끈으로 단단히 묶어야 하지만 빈 박스를 술 취한 장권수와 그 매형이 대충 묶고 있다.
서대장 왈 “그거 그렇게 목어서 되겠냐! 한번 더 묶어”
권명호 : 괜찮아요“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짐을 전부 싣고 제천으로 향했다.
치악재 휴게소를 지나는데 줄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끈이 풀러진 것이 아닌가 하고 전부 걱정을 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냥 진행한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지나서 학산다리를 건널 쯤 끈이 창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고 약간 허전한 기분이 들어 차를 세운다.
먼저 내려선 이형규 대원
“에이 큰일났네, 날라갔네”
내려가 보니 아이스박스는 어디로 가 버리고 뒤에는 차 두 대가 와서 선다.
뒷차에 소나타 운전하는 조치원에서 왔다는 녀석이 욕을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다.
우리도 6명이 우르르 내려서 어슬렁거린다.
그 자슥 기가 약간 죽는 것 같다.
백미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더니 빽빽 소리가 난다고 난리다.
그게 아이스박스에 맞아서 망가졌다고 누구 본 사람도 없는데 이 자슥이 큰소리친다.
까딱 잘못하면 얻어 터질판인데 말이다.
그 뒤에 따라 왔던 무소는 5분 정도 어슬렁거리더니 언제 갔는지 가고 없다.
소나타 속의 가시나 둘은 이 야밤에 바깥의 소란스러움과는 관계없이 화장 고치느라고 정신이 없다.
아마 아이스박스가 떨어지면서 소나타 백미러를 치고 뒤로 날아가고 이것을 무소가 뒤따라오면서 완전히 깔아뭉개 진조밥을 낸 모양
이다.
소나타와 무소 운전하는 놈들이 놀래기는 엄청 놀랬을 게 틀림없다.
큰 사고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다 조상을 잘 모신 탓이려니. 우리 할아버지 산소가 학산 다리 바로 윗 편에 있다.
할아버지 산소에서 바라보면 학산 다리 위에 차 지나가는 것이 다 보인다.
여기 지날 적마다. 할아버지 제가 매번 문안인사 드리는 것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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