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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의 잡념글/약국정담 2007. 12. 27. 12:50
섣달 그믐날의 잡념
이제부터는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기로 하자.
이제부터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열심히 되씹으며 의식적으로라도 행복하다고 외치자.
행복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막연히 알고 있는 그저 그런 행복의 의미만이라도 의식하며 살자.
류마치스 관절염, 지오그렌 증후군, 전신성 홍반성 낭창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앓으면서도 그저 웃음이 떠날줄 모르는 아주머니처럼 고통은 잊어 버리도록 하자. 뼈마디마디 관절마다 쑤시고 아프고 다리 종아리는 아파서 걷지를 못하고 눈은 건조하여 불편하기 이를데 없다면서도 고통의 표정은 하나도 없는 아주머니처럼 남이 보기에 행복해 보이도록 하자.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피곤하다 할지라도 그 고통스럽고 피곤한 표정을 남에게 보이지 말고 행복스럽고 아늑해 보이는 표정을 약국에 들르는 모든이들 한테 전달하자.
생리통이 있는 듯 아랫배를 움켜쥐고 “생리대 주세요” 했을 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 우리 약국에서는 생리대는 팔지 않습니다. 슈퍼에 가시죠” 하며 얼마나 고소해 했던가.
약국에서 생리대 파는 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가씨건 남의 여편네건간에 포장까지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비닐봉지나 안 보이는 봉투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하고 포장해 주는 그런 봉사정신이 너무 풍부하다 보니 덩달아 약값까지 염가 세일하는 그런 봉사정신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여약사라면 몰라도 남약사라면 생리대 파는 것쯤 치워버리자.
그런 것 취급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이 쪼그라들고 째째해진다.
그렇게함으로서 어떤면에서는 표준소매가 가격질서에 약간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고 그러다보면 행복해지고파하는 이 마음에도 기쁜 마음이 감돌지 않을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 중의 한 가운데 앉아 있다.
고통이 없고 아프지 않으면 누가 내 앞에 무엇 때문에 서겠는가.
그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질수 있는 무엇이며 그들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돈이고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과 교환하는 약 뿐인가.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고통 받는 사람은 약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약과 더불어 나의 행복을 같이 나누어 주어야겠다.
“ 왜 이 집 약값은 이렇게 비싸요”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내몸 하나 잘 간수해 보려고 이것저것 찾아 다니고 좋은 것만 골라 먹는 그런 족속 들이다.
모든 것이 부족해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 부족한 것이 있어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그런 사람이 되자.
내가 이름도 모르는 그런 현손, 아니 현손까지 가지 않더라도 손자의 얼굴도 이름도 모를 수 있겠지만, 이런 후손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아귀다툼을 하면서 돈을 버는지 모르겠다.
“돈요.? 뭐하러 버느냐구요? 그것도 모릅니까! 그 돈을 벌�까지의 과정이 너무 스릴이 넘치고 재미가 있어서 버는 것 아닙니까!
" 결과가 너무 좋아서 벌리면 행운이고 망치면 더 큰 고생을 하면서 벌고, 버는 과정에다 운이라도 곁들인다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돈이란 벌기가 힘이 들지 쓸데는 얼마나 많은지 이 양반은 모르는구먼“
하고 빈정대던 사람들
“ 돈 ! 그것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 지구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할려고 벌어요. 있는 거나 하늘에다 갖다 쌓지”
요즈음 돈에 대한 생각이 가지 각색이다.
여하튼 돈이 어는 정도 필요한 모양이니까 조금은 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벌자.
그래야 나처럼 못난 팔불출도 행복감이 더욱 �어 들테니까“
오늘도 온갖 질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모자라는 머리와 작은 손과 얼마 안되는 약만 가지고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은 분명히 힘들 것이다.
약국에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도 아주 꼬락서니조차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 반면 일년에 한두번 들려도 반가운 사람이 있다.
이때도 똑같은 표정으로 대하도록 하자.
나하고는 궁합이 안맞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사람들한테 맞추어야지 그 사람들 보고 나한테 맞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약국을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오더니 이 약국 약 하루치를 지어 갔는데 한 봉 딱 먹고 떨어져 두봉 그대로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고 난 다음 그 처방을 보고 자랑스럽게 보관해 두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처방을 다시 쳐다 보면 이 약을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 싶을 정도로 약의 함량은 엄청나게 높았다.
이것이야말로 무식의 소치이며 앞으로는 이와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모든 아픈이들을 내가 아픈 것처럼 성의껏 대해야겠다.
건너편 구멍가게 앞에 원비, 까스활명수 박스가 보인다.
“ 이 약국은 구멍가게하고 가격이 어떻게 똑 같아요. 조금 싸야지” 하던 못된 아주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한심스런 사람들, 약국끼리 경쟁이 아니라 이제는 구멍가게하고도 가격싸움을 해야 하는 이 처량함을 어디다 하소연을 할 것인가.
그래도 구멍가게에 약을 공급하는 족속들은 약국문을 닫으면서 와! 이 많은 돈돈돈 --- 돈을 세지도 못할 정도로 많아 지갑에 무조건 구겨 넣으면서 온갖 포만감에 젛어 있을 것을
구역질 나는 녀석들.
이제 내일이면 설날이구나.
여태껏 있었던 일은 잊어 버리고 내년부터는 행복해지기로 하자.
행복도 어거지로 만들면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하리라.
오늘밤은 푹 자도록 하자.
내년에는 행복을 포크레인으로 푹푹 퍼 담는 꿈을 꾸도록 하자.
충북약보 제3호 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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