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우리 엄마 암 맞아요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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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엄마 암 맞아요
    글/약국정담 2007. 12. 27. 12:41
     

    우리 엄마 암 맞아요?


    오늘 난데 없는 꼬마를 만났다.

    꼬마라기보다는 이제 국민학교를 막 졸업 했으니 열네살,  꼬마라고 할수도 없을 것이다.

     이 년전 이 꼬마는 엄마 손을 잡고 약을 지러 오는데 따라 오곤 했었다.

    버스를 두시간  가까이 타는데도 그 꼬마는 학교도 가지 않고 엄마를 따라 와 온갖 짖꿎은 장난을 다 치곤 했다.

    엄마의 약을 조제 할 시간도 못 참아 오락실도 찾아가고, 짜장면도 사 먹으러 가곤 했다. 

    그러면 그 엄마는

      “ 그래 빨리 갔다 와라.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빨리 와라” 하면서 적은 돈을 쥐어 보내곤 했었다.

    약을 다 짓고 한참을 지난 후에도 엄마는 꼬마가 올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아들 하나가 한없이 귀여웠고 사랑스러워 했고 대견스러워 했다.

     “ 오늘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내가 차를 타고 오려면 워낙 힘이 들어서 부축해서 가자고 선생님한테 말씀드리고 같이 왔어요“ 하면서 큰 한숨을 내 쉬곤 했다.

    “ 오년전에 애 아버지가 돌아 가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저 애 하나를 의지하고 조그만 구멍가게에 담배 점포하나 가지고 그냥그냥 살아요.

    그런데 몸이 이렇게 아파서 움직일수가 있어야죠. 돌봐줄 사람없는 저 애를 두고 죽을수도 없고 ----  선생님!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대학병원에 갔더니 암이라잖아요. 수술도 못한데요. 내가 암인지 한 번 봐 주실래요“ 하면서 배를 걷어 부쳤다.

    배를 눌러 보라는 것이다.

    여기에 뭐라고 얘기 하겠는가. 병원에서 검사란 검사는 다 해도 알아내기 힘든판에 손으로 만져서 무슨 재주로 그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안단 말인가

    “ 암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 보죠. 설마하니 암일라구요”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네는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와 했다.

     이날 이후 꼬마의 엄마는 1년 가까이 열흘마다 약국을 들락거렸다.

     “ 우린 친척도 하나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저 애 하나밖에 없는데 저 애가 다 클 때 까지 살아야 되요“  올적마다 되뇌이는 말 이었다.

      그러다가 얼마간 소식이 없다간 육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삽복더위 찌는듯한 여름인데도 벙거지 모자를 쓰고 꼬마의 엄마가 다시 나타났다.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 대학병원에 다녔어요. 암이 확실하데잖아요. 병원 약을 먹었더니 머리가 다 빠졌어요.  그러니 할 수 없죠. 이 모자라도 써야 될 것 같아서요“ 하면서 씽긋 웃는다.

    “ 내가 죽으면 우리 새끼 어찌할꼬” 하면서  또 자식 걱정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신세 한탄을 했다.

    “ 애가 워낙 똑똑하고 잘 생겨서 걱정 안해도 될텐데요. 자식 걱정 하지 말고 빨리 병이나 나으셔야죠“ 이 따위 쓸데없는 말밖에 만날적마다 내 입에서는 나오지 못했고 이후 그 꼬마의 엄마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 꼬마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약국문을 빼꼼히 열고는 “ 아저씨 우리 엄마 암 맞아요” 라고 묻는다.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 네가 누구지?” 하고 물어 보려다가

     “ 아! 너로구나” 반가워 하면서

     “ 어쩐 일이냐” “ 요즈음은 뭐하냐” “ 중학교는 갔구” 하고 물었다.

     “ 아뇨 중학교는 못 갔어요. 엄마가 돌아 가셨거든요. 그래서 지금 충주에서 일해요” 하는 것이다.

      “ 뭐 엄마가 돌아 가셨다구” 깜짝 놀라 물었다.

       예! 돌아 가셨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 암 맞아요”  하고 재차 물었다.

       “ 그래 암이 맞을거야” 다 죽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꼬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 그래 너 충주에서 뭐하냐”

         “ 그냥 가게에서 일해요” 하고는 대답하기가 바쁘게 도망 가 버렸다.

         궁금한 것이 퍽이나 많았었는데 다시는 안 보겠다는 듯이 그 꼬마는 가 버렸다.

         뛰어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참 아까운 꼬마다.

         그 꼬마는 참 잘 생겼다.

         크면 한자리 할 귀공자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 꼬마는 이제 무엇을 먹고 싶어도 사 달라고 조를 엄마도 없고 응석을 부려도 받아 줄 사람조차 없다.

          중학교에 가면 큰 도시에 나와서 다녀야 한다는  꿈도 멀리 날려 보낸채 혼자의 앞길을 가야만 한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에 나오는 큰 아들의 나이와  비슷하다.

          하긴 영화 속의 큰 아들은 밑으로 동생이 간난아이까지 포함하여 여섯일곱은 되었으니 훨씬 힘이 더 들었겠지만 이 꼬마가 그런 부담

           이 없어 덜 고달플거라면 이건 큰 억지이겠지.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이 세상에 큰 행복이 있다면 첫째는 내가 건강하고 둘째는 온 가족이 건강하고 셋째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엄마 암 맞아요”  하면서 의혹스런 눈초리로 쳐다 보는 그 꼬마의 모습이 아른 거린다. 

           추운 겨울은 다가오는데 부모 없이 외톨로 지내는 그 꼬마가 겨울  찬 바람을 잘 이겨 내기를 우선 빈다.

           그렇게 꼬마가 �아 다녔는데도 꼬마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면서 왜 이렇게 남의 일에 무관심 했나 반성해 본

            다.


                   1989. 12. 18 약사공론 수필란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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