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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문화재단지 [제 4 경]제천이야기/제천 10 경 2010. 9. 10. 09:05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풍은 거주지의 중심이었기에 이 곳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 쟁탈지이기도 하였다.
청풍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이 부근의 중심지였으나 일제시대 중앙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수로에 의한 운반이 줄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지만 이 이전까지는 수운을 이용한 고을로서 무척 번창한 고을이었다.
1978년 충주댐의 건설로 이 부근의 5개면 61 개 마을이 수몰되자 이 부근에 있던 각종 문화재들을 한 곳에 모아 문화재단지를 조성하였다.
단지 내에는 보물, 지방유형문화재. 비지정문화재 등 53 점의 문화재와 유물전시관, 수몰 역사관 등의 전시시설이 있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문화재를 관람할 수 있다.
고가에는 각종 생활유물 190여점을 전시하여 작은 민속촌이라 할 수 있다.
청풍문화재 단지 정문인 팔영루로 들어가면 먼저 산수유 나무가 반겨준다. 금남루를 지나면서 한바퀴 돌아 나오는데 대충 보아도 약 3 시간 정도는 소요된다.
청풍문화재 단지 입구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이 단지내에는 청풍석조여래입상[보물 546호] . 한벽루[보물 528호], 박도수가옥[ 중요민속자료 137호] 정원태가옥[ 중요민속자료 148호] 금남루[ 지방유형문화재 20호] 금병헌[ 지방유형문화재 34호]. 팔영루 [지방유형문화재 35호], 청풍향교 [지방유형문화재 64호] 가 있다.
청풍석조여래입상[보물 546호]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서 현재의 청풍강 옆 대광사 입구로 옮겨진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볼 때 10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매우 작아서 우뚝해 보이며 사각형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은 자비로운 부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귀는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옷 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어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허리에는 치마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U자형의 주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을 구부렸고, 왼손은 늘어뜨려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불상으로부터 3m쯤 떨어진 곳에 방치되어 있는 원래의 대좌는 8각의 연화좌로 각 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힘을 느끼게 하고 있지만, 목의 형식화된 주름이라든지 비사실적인 손의 표현과 괴체화된 신체 등을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이 확실하다 [문화재청 내용]이 석불 앞에는 둥근 소원돌이 있다.
석불 앞에서 정성껏 삼배를 하고 그 앞에 있는 소원돌을 들고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으로 자신의 나이만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으니 누구나 앞에 서면 한번 해 보시길.....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손때가 묻어 새까맣고 반질반질하다.
전체높 이 3.33m, 머리높이 82㎝. 청풍강 옆 대광사 (大光寺) 입구에 서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소발(素髮)이다.
얼굴은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긴 귀, 가늘면서도 두툼한 눈, 넓적한 코, 뚜렷한 인중이 특징이다.
목은 짧은 편이고 목 아래에 넓게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여원인(與願印)·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양쪽 어깨에 걸쳐 의습이 무겁게 처리되었다.
또 노출된 가슴 사이로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부분으로 비스듬이 의대(衣帶)가 표현되어 있고 허리 부근에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나타나며 그
아래로 U자형 평행옷주름이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대좌는 8각의 연화좌로서 8각의 각 면·각 합각(合角)에 하나씩 모두 16잎의 연꽃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평면원형의 굄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원만한 상호(相好)나 양감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영향을 느낄 수 있으나, 목의 삼도 표현과 비사실적인 손의 표현 등 형식화된 일부의 표현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벽루[ 보물 528호]
건물의 평면구조는 앞면 4칸, 옆면 3칸이며 단층팔작지붕이다.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락의 마루를 결구한 뒤 주위에 계자난간을 돌렸으며, 그 위에 사각형 기둥을 얹고 다시 그 위에 8각기둥을 세워 상부를 가구(架構)했다.
공포는 익공계(翼工系)이면서도 주심포(柱心包)가 절충되어 있기 때문에 장화반 대신에 따로 만든 화반(華盤)을 설치했다.
다락집 형태의 익랑(翼廊)을 부설한 것이 특이한데 일종의 복도와 같은 형상이다.
즉 사다리를 타고 익랑에 오른 다음 익랑을 거쳐 한벽루로 가도록 되어 있다.
이 익랑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하륜(河崙)이 청풍의 아름다움과 한벽루의 경치에 관해 쓴 글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익랑이 있는 조선시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보물 제528호. 1317년(충숙왕 4)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고,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누각 위에 있는 중수기(重修記)에 "崇禎甲戌九月日賓山翁李埈記"라는 발기(跋記)가 있어 1634년(인조 12)에 개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00년 보수한 것이 1972년 홍수로 무너져 1975년 복원했는데 충주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해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특히 루에 올라 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 은 현존하는 건축물로 전무한 양식이며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며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하륜의 기문도 유명하나 72년 당시 유실된 것을 2001년 다시 복원 하였다.
누각에 올라 아름다운 청풍호반과 금수산을 바라보며 시 한수를 읊을 수 있는 수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오르지 못한다.
지곡리 고가[지방 유형문화재 89 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분 되는데 안채는 ㄱ 자형, 사랑채와 행랑채는 _ 자형이며 전체적으로 ㅁ 자형을 한 특이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후산리고가[충북 유형문화재 85호]
도화리 고가[충북 유형문화재 83호]
황석리고가[지방유형문화재 84호]
조선 말 목조 기와로 건축된 고가로 우너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던 것을 1985년 현 위치로 옮겼다.
" - " 자형의 네칸 집이다.
금남루 [도호부절제아문][ 지방유형문화재 20호]
조선 순조 25년 [1825] 에 창건 되었으며 1985년 현 위치인 문화재 단지내로 이전 되었다.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 절제아문" 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부사 조길원의 필적이라 한다.
건물 구조는 목조기와 집으로 2 층이며 정면 3 칸, 측면 2 칸인데 석조 토단 8 각 고주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누대를 축조하였으며 2 층 누상에는 목조 난간을 돌렸고 겹치마 팔각지붕의 누각이다.
관아를 드나들던 문으로 가운데 문은 부사가 출입하였고 양쪽문은 평민이 출입하였다.
본래 동헌 앞에 설치되어 있던 정문으로 당초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었으나 내삼문은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외삼문인 금남루만 남아 있다.
금병헌[지방유형문화재 34호]
일명 명월정 또는 청풍관이라고도 한다.조선 숙종 7년 [1681] 부사 오도일이 창건하고 영조 2 년[1726] 부사 박필문이 개축하였으며 건물구조는 정면 6 칸, 측면 3 칸의 팔작지붕 목조 건물이다.
청풍부의 동헌으로 부사의 집무장소 및 집회장소로 쓰였던 곳이며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 당시 행정관의 검소한 생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팔영루[ 지방유형문화재 35호]
청풍부를 드나들던 관문으로 조선 숙종 28년 [1702] 부사 이기홍이 창건하고 람덕문이라 한것을 고종 7년 [1870] 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는데 고종 때 부사 민치상의 청풍명월 8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칭한다.
건물구조는 높이 2,2m 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 각의 문을 내었으며 기단 위에 누각을 세웠다.
팔영루의 현판은 부사 민치상의 글씨이고, 출입문 천정의 호랑이 그림은 구전에 의하면 청풍의 재난을 막기 위해 그려졌다 하며 호랑이 꼬리가 청풍 밖으로 되어 있어 호랑이가 먹이를 먹고 청풍 밖으로 배설하여 청풍에는 큰 부자가 없다고 한다.
청풍향교[ 지방유형문화재 64호]
청풍 향교는 지방 향리의 자제 교육을 위하여 고려말에 창건한 당시의 학교로 조선 정조 3년 남숙관이 쓴 명륜당 중수기에 의하면 정조 3 년[1779] 에 청풍면 교리로 이전하였다 하며 구조는 대성전이 전면 3 칸, 측면 2 칸에 익공을 단 목조 기와 맞배집이며 명륜당은 전면 4 칸의 팔작집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 성과 동서 양후위에 민손을 비롯한 16현을 모셨고 동서 양무에는 설총을 비록한 18분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현재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응천각 [지방유형문화재 90호]
조선말 목조 8 작 기와 초익공으로 건축되었으며 한벽루 좌측에 있던 건물로 석축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세운 2 층 누각인데 하층은 단주, 상층의 측면간은 각주, 전면간은 단주를 세웠다.
하층은 기둥 사이에 흙벽을 쳐서 창고 등으로 사용한 듯한데 어간과 좌측 협간 내부에는 토석이 쌓여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고 관아의 부속건물로서 용무차 내려 온 중안 관속들이 객사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망월산성을 오르는 중에 관수당이란 현찬이 있으며 이곳은 객사에 머무르는 중안관속들이 술을 들면서 물에 비친 야경을 감상하던 곳으로 달이 하늘에 뜨고, 강물에 뜨고, 술잔에 뜬다고 하여 야간 풍경을 즐기던 곳이라 전해진다.
망월산성[ 지방유형문화재 93호]
망월산 [373m] 의 정상부와 지맥을 둘러 쌓은 석성지로 둘레가 495m 의 작은 성인데 문지는 북쪽에 너비 3m 의 것이 1 개소 있고,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서남편에 너비 16m , 높이 3m 의 성벽과 남쪽에 너비 15m , 높이 4,6m 의 성벽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의 토기, 기와 조각이 몇 점 발견되었으며 삼국사기에 신라문무왕 13년[373] 에 사열신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 축성 되었으리라 보여진다.
이곳은 문화재단지 입구에서 망월산 정상까지 500m 에 위치하고 있어 가벼운 등산 코스로 최적지이며 정상에는 전망대인 망월루가 있어 청풍호반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제천유물전시관
청풍명월의 고장이며 의병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제천 지역의 많은 문화 유산과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기리고자 94년 부터 4 년간 11 억원을 투자하여 건립하였다.
전시관 1 층에는 구한말 의병의 활동사를 엿볼 수 있도록 하였고, 지하층에는 청풍부읍지의 유물 80여점을 전시함으로서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했던 옛 제천의 문화 유산을 보존 전시한 곳으로 제천시민의 자긍심과 뿌리가 심어 있는 곳이다.
수몰박물관
충주댐 건설로 제천시 관내 5 개면 61개 리 3301 가구가 수몰 되었다.
이 역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2003년 8억 3 천여만원을 투자하여 수몰지역에 대한 수몰전 역사, 문화재, 생활모습등 모형도를 통하여 재현하였으며 정보 검색 코너를 설치하여 누구나 수몰현장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문화재단지에서 본 청풍대교
문화재 단지에서 본 청풍호
방송국 촬영 세트장
석물군
문화재 조성 당시 고대 사회의 장례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선사시대의 무덤인 지석묘 5 점과 문인석 6 점, 조선시대 군수나 부사의 공덕비, 송덕비, 선정비 21 점 등 비지정문화재 31 점을 옮겨 놓았으며 97년 제천 향교에서 비석 10점을 추가로 옮겨 이곳에 전시함으로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강한 변의 비석문화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양반 고장의 온화한 심성과 청풍명월의 본 고장을 상징하는 " 청풍명월" 비석을 1985년 12, 23 일 문화재 단지 개장 기념으로 건립하였으며 이 비석은 높이 8m 둘레 85cm 로 돌의 원산지는 수산면 능강리 취적대 부근 화강석으로 석파 현수근 씨의 글씨다.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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