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추억 속의 우리 집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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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속의 우리 집
    글/주변의 일상이야기 2009. 11. 7. 09:45
     
    나는 태어나기는 단양, 적성면에서 태어났다.
    아주 깊은 산골이다.
    지금은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금수산 중턱에서 태어난 것이다.
    내가 돌이 되기 전 군에서 제대한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 제천으로 나왔지만 살곳이 변변찮은 시절이라 남의 셋방을 빌려 그 집
    주인의 일을 거들어 주면서 살아 오다 몇 년후 집 주인의 땅을 빌려 그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어릴 적 기억에는 아버지는 그 집을 짓기 위해  아주 멀리까지 가셔거 서까래를 할 나무를 베어 지고 왔던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집을 짓고 난 후 이사하던 날 이삿집을 나르다 장독을 깨고, 왜 어린 나까지 허둥대고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그 집에서 내 밑으로 여동생 넷이 나고 자랐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안 모두들 아무 탈없이 잘 자랐고 모두들 결혼해서 전부 잘 살고 있다.
    그 집이 도로가 나면서 헐릴 때까지 아버지가 손수 지었던 그 집은 우리에게는 안식처였다.
    집이 헐리고 몇년 후 그곳을 가 보았더니 그집은 고물상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지저분하고 어지럽고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아쉬웠다.
    비록 기찻길 옆 오막살이이지만 깨끗하고 살기 좋은 모습으로 변해 있으면 좋았으련만 너무 비참하게 바뀐 모습에 애들 데리고 가면
    서도 이 집이 내가 살던 곳이야 라고 이야기 하는 것 조차 부끄러웠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조선일보 신문에 그 고물상에 살고 있는 사람의 기사가 실려 유심히 보고 아직 내가
    살던 땅은 좋은 땅인가보다 하는 마음이 가슴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충북 제천에 있는 '제천종합자원' 김영환씨.
    그는 13년 전 자동차 사고를 당해 목 아랫부분을 원활히 쓸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일상생활을 해야 하였다.

     

    고철, 싱크대, 폐지, 플라스틱 통, 장판, 옷 등 각종 고물이 종류별로 산을 이룬 고물상 곳곳을 전동 휠체어로 돌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쓰레기라고 버린 물건들이지만 다 쓸모가 있습니다."

     

     그는 올 2월부터 '착한가게' 주인이 됐다.
    매달 고물을 판 돈 중 2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보낸다.
    "한 달에 겨우 그 정도인데…. 저는 좋은 일 하는 것도 없어요."

     

     그의 2만원에는 사연이 있다.
    김씨는 원래 버스 운전기사였다.
    1974년 운전면허를 딴 이후 시내버스·시외버스를 몰았다.
    1996년, 그는 운전 일을 그만두고 부인 김순자(金順子·52)씨와 함께 제천에 식당을 열었다.
    그는 "그해 11월 23일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처가댁에 있는 김장독을 가지러 가는 길이었어요.
    아는 사람에게 빌린 트럭을 몰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어요.
    갑자기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빙판길이라 차가 핑그르르 돌더니 둑 아래로 떨어졌어요.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이때 사고로 김씨의 경추(頸椎) 7개 중 5개가 부서졌다.
    수술을 받았지만 목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김씨는 "그때 내 몸은 통나무 같았다"고 했다.
    재활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입원 석 달 만에 병원에서 나와야 했다.

     

    일주일마다 들어가는 입원비 5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미리 들어둔 보험도 없었다.
    빌린 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내 망가진 차 값도 고스란히 물어줘야 했다.
    김씨의 부인은 "당시 빚만 4000만원이 넘었다"고 했다.

     

     퇴원 이후 김씨는 식당에 딸린 뒷방(약 6.6㎡·2평)에서 지냈다.
    2년간 종일 천장만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겨우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온 어느 날 오후, 식구들 도움을 받아 식당 앞 의자에 나와 앉아 있던 김씨 앞으로 리어카 한 대가 지나
    갔다.
    고물장수였다.
    김씨도 고물을 모으기로 했다.

     

    "이대로 있으면 영원히 누워 지낼 것 같았습니다. 무조건 일어서야 한다고 마음먹었어요. 제가 운전은 잘했으니까, 고물을 차에 싣고
    내릴 사람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김씨는 카드빚을 내서 100만원짜리 중고트럭(1t)을 샀다.
    부인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매일 아침 김씨의 부인과 당시 고등학생이던 큰아들(29)·작은아들(28)이 힘을 써서 김씨를 트럭 운전석에 앉혔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나 며칠 동안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얼마 후 자기 팔로 뻣뻣한 다리를 옮겨가면서 가속기와 변속기,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 겨우 운전을 했다.
    속도는 시속 10~20㎞였다.

     

    운전에 익숙해진 김씨는 조수를 구해 트럭에 태우고 2인 1조로 고물을 주우러 나갔다.
    경험이 없다 보니 새벽 1시까지 운전을 해도 허탕치는 날이 많았다.
    "그땐 아직 몸에 감각이 온전치 못했어요. 거기다 잔뜩 긴장까지 하니까, 한동안은 대소변을 보는 줄도 몰랐어요. 냄새로 알았죠. "

     

    그때마다 다시 집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아내가 저를 씻기고 다시 운전석에 앉혀줬어요."

     

    김씨는 며칠 동안 모은 고물과 폐지를 팔고 1만원짜리 두 장을 받았다.
    사고 난 지 2년 만에 처음 스스로 번 돈이었다.
    김씨는 "2만원이 모여 4만원이 되고, 10만원이 됐다"고 했다.

     

    그는 1999년 기찻길 옆 공터(약 562㎡·170평)를 임차해 고물상을 차렸다.
    부인도 식당 일을 그만두고 고물 모으는 일에 매달렸다.
    열심히 돈을 벌어 빌린 땅을 사들이고, 인근 땅도 조금씩 매입해 현재의 규모(2644㎡·800평)로 키웠다.

     

    종업원도 3명 뒀다.
    빚도 다 갚았다.
    비만 오면 물이 새던 비닐하우스 사무실은 컨테이너로 바뀌었다.

     

    김씨는 지난 연말 TV를 보다가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정기 기부 운동을 하는 걸 보고 착한가게 캠페인에 동참하게 됐다.

     

    그는 "가끔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5만원 또는 10만원을 내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며 "정기 기부는 부담은 적고, 쌓이면 큰돈이
    된다는 말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김씨는 자신이 고물을 팔아 처음 손에 쥐었던 돈 2만원을 매달 기부 액수로 정했다.
    그는 "2만원이 솔직히 큰돈은 아니지만 저처럼 그 돈을 손에 쥐고 다시 일어서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의 부인과 큰아들도 각각 매달 5000원, 6만원씩 다른 복지단체에 정기 기부를 하고 있다.

     

    컨테이너 사무실 한쪽에는 지난 4월 김씨가 직접 주문 제작했다는 가로·세로·높이 각 30㎝ 크기의 플라스틱 투명 불우이웃돕기 모금
    함이 있다.

     

    100원짜리 동전에서부터 1만원 지폐까지, 김씨 부부는 물론, 폐지나 빈병을 팔고 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넣고 간다.

     

    "단돈 5000원이나 1만원을 받아가시는 할아버지·할머니께서도 이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1000원, 2000원씩 넣고 가시죠.
    그럴 때면 저도 곧바로 그만큼씩 돈을 넣게 됩니다."

     

                                                                                                                      11월6일 조선일보에서

     

     

     

    우리가 살던 그 땅은 우리가 나오고 쓸모가 없어지자 고물상으로 세를 놓았고 몇년이 지나자 그 고물상 주인은 그 땅을 팔아라 라고
    자꾸 연락을 취해 와서  대전으로 이사를 간 땅 주인에게 연락을 하여  그 땅을 팔았다.

     

    비록 내 땅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은 아버지와 내가 관리를 한 입장에서 팔아 버리자 홀가분해 졌다.
    그 이후 가끔 그곳을 지나면서 보면 콘테이너 박스와 고철 등으로 너무 지저분하여 이 고물상이 동네 다 버려 놓는다고 생각을 하였었
    는데 오늘 이 신문 기사를 보고 많은 부분에서 위로가 된다.

     

    부디 그곳에서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형제들이 그 집에서 반듯하게 자란 것처럼 그 집의 자녀들도 반듯하게 자라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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