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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전국의 유명 산 2012. 7. 2. 10:03
운악산(雲岳山·935.5m)은 양주의 감악산, 가평의 화악산, 개성의 송악산, 과천의 관악산과 함께 경기도의 5대 명산으로 꼽히던 경기오악(京畿五岳)이다.
그리고 풍우(風雨)의 조화가 구름 속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산이름에 운(雲)자가 붙었으니, 그 뜻은 천문의 기운이 응결된 땅이란 의미일 것이다.
‘악(岳)’은 산 높고 험준하다는 뜻이니 결국 운악(雲岳)은 ‘천문의 상서로운 기운이 응결된 높고 준험한 산’이란 뜻이 된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계곡, 그리고 울창한 단풍나무 수림과 수백 척 벼랑에서 물보라를 쏟는 무지치폭포가 절경을 이루는 운악산은 예로부터 영험있는 산으로 소문이 나면서 기도꾼들이 끊이지 않고 출입하는 명소가 되기도 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지> <포천군읍지>와 <산도후기(山圖後記)>에는 ‘한양 동쪽의 모든 산은 현등산으로 중조(中祖)를 삼으니 운악산은 뭇산의 조종(祖宗)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운악산은 한북정맥에서 갈라져나온 거의 모든 산들의 모태가 되는 산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글이 <포천군읍지> <견성지> <산경표>에도 전해지고 있다. <산경표>에는 ‘포천에서 동쪽으로 30리, 가평 경계에서 서쪽으로 60리에 운악산이 있는데, 일명 현등산으로 불린다.
이 산에서 산줄기가 넷으로 나뉘어진다(雲岳山一名懸燈 抱川東三十里加平西界六十里分四岐)’고 기록하고 있다.
운악산 이름은 <동람도-경기첩>,〈청구도〉,〈세종실록지리지〉,〈해좌승람〉,〈대동여지도>, <경기 37관도>, <경기 38관도>, <대동지지-가평조>, <여지도-경기첩>, <동여도>, <대동여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보인다.
또 <동국문헌비고>와 <해동도>에는 운악(雲岳)이라고 기록했으며, <해동여지도> <포천군읍고지도>에는 현등산 기록만이 보인다.
<동여비고> <경기고지도첩> <여지도> <천하여지도책-경도도>에는 운악산과 현등산(懸燈山)을 병기했다.
그리고 광무년간(1899년)에 편찬된 <포천군읍지>에는 ‘운악산은 포천 고을로부터 동쪽으로 30리쯤에 있는데, 곧 현등산 동쪽에 있는 산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는 기록자가 매우 부정확하게 오기한 경우이다.
또 고산자 김정호는 운악산과 현등산을 <대동여지도>에 병기하면서 운악산의 동편에 현등산을 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기록을 근거로 하여 똑같은 산을 가평 사람들은 예전부터 현등산이라고 불렀고, 포천 사람들은 운악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라고들 말한다.
실제로 가평쪽(조종면 상판리)에 현등사라는 절이 있어서 이 주장은 더욱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지방사람들의 엉터리 믿음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광무읍지> <대동여지지> 산천조를 살펴보면 예부터 가평과 포천 고을에서 모두 이 산을 운악산으로 인식했던 사실을 기록으로 분명히 남겨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운악산의 대표적인 산이름은 운악산이 분명 옳다고 하겠다.
다만 현등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예로부터 ‘현등사라는 절이 있는 산’이라고 인식하고는 현등산이라고도 향명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현등사사적기>에조차 “보조국사 지눌이 망일사 원통암에 머물며 운악산을 바라보니 산 속에서 삼일동안이나 밝은 빛을 내뿜었다. 지눌이 기이하게 여겨서 그 곳을 찾아가니 과연 관음전이 우뚝 서있고 남쪽 바위 위에 옥등(玉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절을 중창하고는 ‘등불(燈)이 걸려있던(懸) 절(寺)’이라고 하여 현등사라 이름을 정하니 산이름도 현등산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본래 산이름은 운악산이었는데 현등의 신이한 행적 때문에 현등사가 세워지면서 또 다른 산이름으로 현등산이 되었다고 그 유래를 비교적 적확하게 밝히고 있다.
항일의병을 도모하다 은신자로 쫓겨서 조선 산천을 주유한 정갑성 처사는 “금강산을 떠난 후로는 조선팔도에서 다시는 절경을 볼 수 없었는데, 운악산에서 마침내 금강산의 진경을 보았다”고 극찬했으니 운악산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포천군읍지>와 <견성지>에서도 운악산의 절경을 금강산에 견주었으니 정갑성의 운악산찬송은 지나치게 과분한 대접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포천군 화현면쪽의 운악산 중턱엔 궁예가 한때 웅거했던 곳으로 알려진 석성(일명 花城)이 있는데, 험요한 지형을 잘 살려서 축성한 한국의 마추피추로 비유되며, 견훤성, 양평의 함왕성과 함께 신라 말 호족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모형이다.
운악산성은 포천군 화현면 화현리 운악산 산중복(해발고도 350~450m 일대)과 정상부에 세워진 석축산성으로, 기암절벽의 천연지세를 절묘하게 활용한 성곽 형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축성에 동원된 대다수의 군사와 부역장정이 이곳 포천(견성 및 양골현민) 출신임을 추정하게 한다.
산성 길이는 약 2.5㎞에 달하며 높이가 3m~0.5m의 겹성(二重城)인데, 상당 구간이 훼손 멸실되어 정확한 실체는 발굴이 진행되어야 규명될 것 같다. 운악산성은 신라 말와 고려 초의 역사적 공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이며, 독특한 형태를 갖춘 산성 모형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와 규명이 요구되는 중요 역사자료다.
이 지방의 대표적 향토사지라고 할 수 있는 <포천군읍지>에조차 운악산성의 기록이 없고,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도 운악산성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선 중·후기의 고문헌 및 사료에도 운악산성의 기록이 일체 누락된 것으로 추정하건대, 이미 이 시기엔 군사시설로서의 활용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폐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다만 영조 34년(1758년)에 이세욱(李世郁) 등이 편찬한 <견성지(堅城誌)>에 유일하게 운악산성과 연관된 두 가지 기록이 전해져오고 있다.
첫째로 산천조에 ‘운악산은 포천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즉 가평 현등산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산꼭대기에 옛나라의 궁궐터가 있다’고 기록했는데, 옛나라의 궁궐터라 한 곳이 아마도 현재 궁예왕 대궐터라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지치폭포 상단의 운악산성 내 평탄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로 충신조에 ‘조득남(趙得男)은 본관이 한양 사람인데, 한천부원군 조온의 후손이다. 포천현의 동쪽 20리 운악산 아래 화성리(花城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중략…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의 북문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 인조 임금이 놀래 애도하면서 유포를 내려 시신을 싸서 북문 아래에 매장토록 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화성리(花城里)에 옮겨 장례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이 시기에는 운악산성을 화성으로 불렸었음을 추찰할 수 있다.
따라서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나 <견성지>가 만들어지던 시기까지는 이 지방에서 토착지역민들이 운악산성을 화성(花城)이라고 부르고, 운악산 또한 향명으로 화산(花山)이라고도 불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지방의 대표적인 방외문인이었던 봉래산인 양사언의 시에 운악산을 이르기를 ‘天作高山壓震方 / 芳名流傳小金剛 / 花峯崔崔參 漢 / 積翠蒼蒼接大荒…’이라고 했는데, ‘花峰崔崔參 漢(꽃같은 봉우리는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에서 화성(花城)과 현재의 지명인 포천군 화현(花峴)면의 단서가 되는 부분이 보인다.
운악산은 이름 그대로 뾰죽뾰죽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아 그 모습이 마치 서기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았다. 그래서 지명이 운악산이 된 것인데, 후일 자연발생적으로 화산(花山·華山)이란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예가 인근의 가평 화악산에도 있다. <대동여지도> <동여도> <가평군읍지> 등에는 화악산을 화악산(華嶽山)으로 기록된 데 비하여, <수진일용방> <팔도전도> <경기고지도첩> 등에는 화악산(花嶽山)으로 기록되어 華와 花는 지명에서 서로 통용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의 성은 수변(水邊)의 요로가 되는 언덕이나 주요 교통로를 이루는 산의 정상부나 고갯마루에 축조되었다. 그래서 고개를 의미하는 ‘재(잣-작-鵲-栢으로도 표기)’라는 말이 ‘성’이라는 의미까지도 뜻하게 되어 오늘날 ‘재 성(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꽃성(花城)’과 ‘꽃재(花峴)’는 결국 같은 의미의 지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부 역사연구자들이 화현을 서파 부근에 있는 봉수리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봉화를 피우던 고개(峴)→火峴→花峴’으로 주장하기도 하나, 운악산과 봉수대 자리는 거리가 너무 많이 떨어져서 무리가 많은 주장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툭 앞으로 삐져나오거나 솟은 땅’을 말하는 곶(串)이 변음(격음화)되어 꽃이 되었다는 설(필자)은 문헌연구와 지형지세 관찰을 통해 규명해볼 만한 주장이다.
이 산성은 궁예 세력과 왕건 세력이 포천 지방에서 상당기간 팽팽하게 대립한 역사를 증명해주는 흔적이다. 이런 사실를 증명해주는 분명한 기록이 <고려사> 권1 세가 제1 태조에 전해지고 있다. ‘계미 6년(923년) 봄 신축일에 명지성(포천의 옛이름) 장군 성달이 그 아우 이달·서림과 함께 고려에 와서 항복하고 붙었다(辛丑 命旨城將軍 城達與其弟伊達瑞林來附)’는 기록은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 태조로 등극하고서도 6년 동안이나 포천 고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역사서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유일에 진각성경 유척량이 혁명(왕조교체) 당시에 여러 동료들은 당황하여 뿔뿔이 도망하였으나 그는 홀로 본성을 떠나지 않았고, 맡은 바 창고는 조금도 손실이 없게 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광평시랑의 벼슬을 주었다(丁酉以珍閣省卿柳陟良當革命之際群僚倉卒散走獨不離本省所典倉庫 無所亡失特授廣評侍郞)’는 기록으로 본다면 상당수의 호족과 성주가 권력교체의 쟁투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거나 궁예 편에 가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중 포천 영평과 연천 양주 일대의 여러 고을은 철원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철원에서 패주해온 일부 궁예 세력과 합세하여 궁예왕 부흥운동을 펼쳤으리라 추찰된다.
운악산 주변에는 궁예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구전되는 명성산성, 보개산의 보가산성 등이 남아있다. 또 포천 지방과 연천 지방에 궁예와 관련된 성동리 패주골, 항서받골, 야전골, 망봉, 궁예왕굴, 강씨봉 등의 지명이 수없이 산재한 까닭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운악산성이 곧 궁예왕의 피성이라는 주장에는 여러 정황 상 방증근거가 불명확해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포천 지방을 지배했던 장군 성달이 축성한 성으로 보이며, 그가 이곳에서 궁예왕의 잔존세력과 연합하여 상당기간동안 왕건에게 복속하지 않고 대항하였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계미 6년(923년) 봄 3월 신축일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그 아우 이달 서림과 함께 귀순하여 왔다(辛丑命旨城將軍城達與其弟伊達瑞林來附-고려사 권 제1세가 제1태조)’와 ‘계미 태조 6년(923년) 여름 6월에 신라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고려에 항복하였다(고려사절요 권1)’는 기록이 대표적인 기록이다.
신라 후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하여 내려간 중앙 귀족과 그 지방에서 성장한 토착적인 촌주(村主) 출신,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軍鎭勢力) 등이 지방호족으로 대두하여 농민반란 등 혼란한 사회적 환경을 틈타 각지에서 봉기 웅거하였다. 그래서 신라 하대의 호족들은 성주,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중앙의 정치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 즉 관반제를 갖추고 지방사회를 통치하기까지 했는데, 북원의 초적두령 양길(梁吉), 양평의 승려 출신 함규(咸規), 하동의 호장(戶長) 출신 정도정(鄭道正), 목천의 백제 유망민 마육황, 풍양의 토호로 추정되는 조맹(趙孟), 전라도 지방의 신라 군관 출신 견훤(甄萱) 등이 대표적 세력이었으며, 특히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기훤과 양길의 부하였다가 독립한 궁예였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불과 130개였는데 비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무려 374개나 되어 중앙통치력이 지방까지 침투하지 못해 매우 불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는 호족연합에 의한 건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현제(郡縣制)는 신라 말 통치질서의 해이에 따라 무너지고 사병을 거느린 호족들에 의하여 전국이 분점되었는데, 호족들의 항쟁 속에서 지배복속의 관계가 생겨 대호족은 중소 호족을 지배하게 되고, 이것이 더욱 진행되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 복속의 관계는 가변적인 것이었고, 대·중·소 호족들은 엄연히 독자의 지배구역을 보유했다. 이런 상황은 왕건의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고려는 초기에 호족들과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 23년(940년) 또는 고려 초라고 기록된 시기에 주현 명호(名號)의 개정과 함께 잔읍(殘邑)을 부근 군현에 소속시킨 사실은 이들 호족들의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찾아가는 길
운악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평군 조종면 현리에 소재한 현등사를 통해 오르는 길이 하나이고, 포천군 화현면의 운주사와 운악정을 통해서 오르는 길이 또 다른 코스다.
주말에 붐비는 인파를 피해서 고즈넉하게 여유있는 산행을 즐기려는 분들께서는 현등사 반대편에 위치한 운주사 운악정 코스를 권하고 싶다.
서울에서 광릉내를 거쳐 이동행 국도로 가다보면 도로확장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무지치마을 입구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운악산 산행기점이다. 승용차로는 서울에서 90분이 소요된다.
운악산 전경이 보이는 곳에 자리한 예쁘장한 무지치 마을(031-533-9355)은 운악산 등산정보를 제공하는 산악인의 쉼터이기도 하다.
무지치 마을에서 안내판을 따라 지능선 길로 30분 오르면 요새 같은 협곡에 절 한 채가 나타나는데, 이 곳이 청학사이며 소꼬리폭포라는 명승지를 감상할 수 있다.
청학사 입구에서 산비탈길로 다시 20여 분 오르면 산성의 형적이 군데군데 나타나는데, 이 지방에서는 이를 ‘궁예왕 피성’이라고 부른다.
옛 문헌에 기록된 화성(花城)이 바로 이 곳이며 최근 운악산성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옛 호족의 역사를 웅변하는 운악산성 능선을 따라 다시 1시간 힘겹게 오르면 2개의 평탄한 정상이 나타난다.
일부 사람들은 이 때문에 아마도 운악산과 현등산이란 지명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가평군과 포천군에서 각각 정상에 표지석을 경쟁적으로 세웠다.
가평쪽 정상부에는 청학대라는 명소가 있는데, 만해 한용운이 이 곳에서 명상하며 십현담서론이라는 유명한 글을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포천쪽 정상부에는 깍아지른 백척 바위절벽이 시원스럽게 나타난다.
절벽 사이로 난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면 정상부인데도 많은 수량의 샘물이 용출하는 샘터가 나온다.
항일의병을 도모했던 정갑성이 은신했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정처사막터로 부른다.
포천쪽 정상(만경대)에서 서북쪽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양편으로 돌무더기가 쌓여있는데, 모두 허물어진 성돌이다.
성의 규모가 어머어마했던 것이다.
정상에서 다시 1시간 내려오면 산곡사이로 평탄지가 나타나는데 대궐터로 불리는 곳이며 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현장이다.
대궐터에서 30분 더 내려오면 기도꾼들이 산막을 여러 채 만들어 놓은 현장에 닿는다.
그런데 무속인이 거처하는 움막이 난립하면서 성돌을 빼내어 축대와 건축재료로 사용하여 성의 형태가 심각할 정도로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며, 무지한 등산객들이 산성을 등산로로 이용하면서 많이 허물어지고 있다.
일부 산악인들은 산성에 있는 돌을 빼내어서 탑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산성의 본래 축성 형태를 확인할 수 없게 되며, 복원작업을 할 때 모형조차도 찾기 어렵게 된다.
또한 사적으로 보호받지 못하여 청자편, 기와편 등이 등산객들에 의해 반출, 파괴되어 유물유적이 급격히 멸실되어 가는 안타까운 현장이다.
무속인들의 산막을 벗어나면 산비탈길 아래로 무지치폭포라는 운악산 최대 명소가 나타난다.
무지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40분 내려서면 처음 출발했던 무지치 마을 주차장에 원점회귀하게 된다.
자료 월간산 : 정우영 기자 향토사학자 :이수영2012.07.01 07 : 00 제천 출발
09 : 15 운악산 하판리 주차장 도착
09 : 30 현등사 입구 매표소 앞에서 산행 시작
매표소는 있으나 입장료는 받지 않음
매표소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일주문이 있음
현등사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며 일부는 비포장이고 일부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음
09 : 38 좌측 화장실을 지나 우측 산행로로 들어 섬
현등사 방향으로 진행하여 절고개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면 오르기는 편하지만 정상에서 눈썹바위로 내려오는
길이 무척 험하다.
오르기 힘들더라도 눈썹바위를 지나 미륵바위를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절고개를 거쳐 현등사 방향으로 내려 오는 것이
맞을 듯
이정표에 표시 된 거리는 실측 거리가 아니라 지도상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음
정상 2,6km 되어 있어 한 시간이면 되겠네 하였는데 무려 3 시간 가까이 걸림
10 : 19 눈썹바위
눈썹바위를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어려운 코스는 아닐 듯.... 하지만 사고는 조심하고.
이 지점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는 험한 바위의 연속
여기부터는 등산 스틱을 이용하기 보다는 네발로 기는 것이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이것은 무슨 바위인지,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눈썹 바위 바로 아래를 지나는 길.
이 바위 위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춤을 추는 것을 보면 인간은 올라 타는 것을 좋아 하나 봐
눈썹바위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바위에는 어김없이 이와같은 쇠가 박혀 있는데 비가 온 후라 얼마나 미끄러운지... 사고나기 십상
이것 빨리 치우고 나무계단을 설치해야 하지 않을까.
10 : 45 병풍바위 전망대
병풍바위 전망대에서는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 사진은 미륵바위 위를 지나면서 찍은 사진임
병풍바위 전망대에서..... 병풍바위는 보이지 않고,
11 : 20 미륵바위
미륵바위보다 내가 더 미륵 같이 생겼네...
안갯속의 미륵바위
안갯 속의 미륵바위
11 : 40 사다리
미륵바위를 지나면 사다리가 나오는데 이 사다리 사이로 보이는 바위인데 요상하게 생겼음
사다리 아래 경치 좋은 곳에서
사다리 .... 옆에 보이는 작은 사다리는 예전에 있었던 사다리인 모양인데 위험해서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궁금....
12 : 05 전망대
그러나 운해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12 : 20 운악산[동봉] 정상 [ 정상 표지석 2 개]
점심 식사 40분
서봉까지는 왕복 10 분 정도 소요... 그러나 오늘은 안개 때문에 조망이 전혀 없어서 포기하고..
정상에서 절고개까지는 한북정맥 구간...
13 : 00 식후 출발
13 : 10 남근바위 전망대
멀리 보이는 남근바위는 안개 속에 희미하고... 어찌 되었건 남근석은 제천 동산의 남근석이 최고 우람하고, 여근석은
도봉산에 있는 것이 가장 예쁘지 않을까..
13 : 20 절고개
13 : 35 코끼리 바위
정말 코끼리 같이 생겼네....
14 : 08 현등사
이곳부터는 차가 다니는 길을따라 매표소까지 원점회귀
절고개에서 매표소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크고 작은 폭포가 수없이 있음
14 : 35 운악산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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