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천성 성도[무후사, 금리거리]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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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천성 성도[무후사, 금리거리]
    이 세상 구석구석/중국 사천성 2010. 8. 14. 16:46

     

     

    사천성의 성도인 성도는 관광거리가 될만한 것이 별로 없다.

    금리거리와 무후사가 있다고 하지만 내가 잠깐 지나며 느낀 것은 사천요리가 아닐까한다.

     

     

     

    성도

     

    쓰촨성 四川省(사천성) (Sichuan)은중국 남서쪽 양쯔강[揚子江] 상류에 있는 성(省)으로 면적 : 56만 9,000㎢으로 한반도 면적의 3 배나 되고 인구는 8천여만명 정도이고 성도(省都)는 청두[成都]이다.

     

    양쯔강· 민장강[岷江]·퉈강[蕣江]·자링강[嘉陵江]의 4대 강이 성내를 흐르기 때문에 ‘四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고 한다.

    한족(漢族) 이외에 이족[彛族]·창족[藏族]·먀오족[苗族]·후이족[回族]·창족[羌族]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다.

    사천은 아열대기후이며, 지형의 영향이 크고, 사천)분지와 천서(川西)고원산지 기후와는 차이가 많다.

    사천분지는 따땃한 아열대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따똣한 겨울, 빠른 봄, 찌는 여름, 가을비가 특징이다.

    1월 평균 5~8℃, 7월 평균 25~29,연평균 15~19℃,서리없는 날이 280~300일. 분지특성상 습기, 안개가 많고, 일조량이 적은 것도 특색이다.

    성도는 일년중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 250~300일이고, 구름이 많이 끼고, 햇볕이 적기로도 유명하다.

     

     

     

    사천성의 성도(省都)는 청두[成都(성도)]는

    예로부터 토지가 기름지고 천연자원이 풍부해『天府(천부의 나라)』라고 불리웠다.

    온화한 기후여서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하며 강우량이 풍부하여 땅이 매우 기름지다.

    사천성 사천 서부 평원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로 평균 해발고도는 400m 정도된다.

    성도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화의 성으로 삼국시대에는 촉한의 도읍지였고 오대 십국 때에는 전촉, 후촉의 수부였지다,

    즉 <三國志演義>의 후반부가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는 곳이지만 그들이 망한 후에 정복자들이 도읍지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 버려 안타깝게도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성도라는 명칭은 2000여 년 동안 바뀌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2000여 년 동안 성도는 사천과 그 일대인 중국서남지역의 행정수뇌기구의 소재지 역할을 지속해왔다.

    성도 날씨의 특징 중 하나는 안개구름이 많은 것과 그로 인해 일조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이드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얼굴이 타지 않는다고 한다.

    성도 날씨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습기가 많아 무척 피부가 끈적거린다.

    여름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가장 높은 온도가 일반적으로 35℃) 아주 후덥지근하다.

    반면, 겨울에는 기온이 평균 5℃ 이상이지만, 흐린 날이 많고 습도가 높아 아주 춥게 느껴진다.

     

     

     

     

     

     

     

     

     

     

     

     

     

    금리거리

     

     

     

     

    금리거리는 삼국시대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으며 음식점 거리와 일반 가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삼국지거리를 그대로 재현한 골목으로서 그시대의 문화를 담은 복장과 건물로 고풍격을 물씬 풍기게 하는 쇼핑 및 맛거리이다.

    여러가지 현지 전통 먹거리 및 다양한 현지 물품등이 진열되어 있고 또한 세련된 바, 커피숍들 널려있다.

    무후사를 관람하고 후문으로 나오면 이 거리로 바로 나온다.

     

     

     

     

     

     

     

     

    무후사

     

    무후사란 일반적으로 제갈량을 모시는 도교 사당이다. 무후라고 하면 제갈량의 시호인 충무호에서 따온 것으로 보통 제갈량을 말한다.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과 그 임금 유비를 함께 모신 사당이다. 보통 군신을 같이 모시지 않은 관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14세기 말에 무후사는 조열묘와 병합되어 현재의 정식 명칭은 한조열묘이지만 주군인 유비를 촉나라의 이웅은 무후사를 만들고,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

    현재와 같이 제갈량과 유비를 같이 모시는 사당으로 정비된 것은 명조에 이르러서이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은 청나라 때 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고 있다.

    가하는 제갈량의 재덕을 기려서 지금까지도 이곳을 무후사라고 부른다.

     

     

     

     

    후세의 삼국지나 삼국지연의 등에서 제갈량 이외의 촉한의 무장이나 가신, 또한 촉의 임금인 유비나 그의 후대를 이은 유선까지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유선의 제위는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남송 때 폐사(廢祀)시켜 버렸다.

    서기 223년 유비의 능묘가 조성되었다.

    국보 무후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삼절(문장, 서법, 석각기술)로 이름이 높은 당비, 촉한시대에 유비를 받들던 문, 무관 28인의 소상, 제갈량이 남쪽을 정벌할 때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두드려 경보를 보냈다는 제갈고, 유비의 묘인 혜능 등을 들 수 있다.

     

     

    유비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 왕(221∼223). 자는 현덕(玄德). 탁군(河北省) 출신.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이며,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귀가 컸으며 또한 손을 내리면 손끝이 무릎까지 닿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멍석을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의 장비(張飛)와 탁군에 망명한 관우(關羽) 등과 손을 잡고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직접 지배하는 영토없이 각지의 호족 공손찬(公孫瓚)·도겸(陶謙)·조조(曹操)·원소(袁紹)들 사이를 전전하였다.

    조조 밑에 있을 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라고 하자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유비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곳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였다.

    유표의 밑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육지탄의 푸념을 하는 한편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등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갈량에게는 삼고(三顧)의 예를 갖추어 맞이했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모신(謀臣) 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208년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남하해 오는 조조를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격파하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기초를 쌓았다. 전쟁 후에 형주를 오(吳)나라와 양분하고, 손권의 누이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익주(益州;지금의 四川省)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유비는 211년 익주목(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의해 촉나라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략하여 익주를 차지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와 손잡고 형주에 남아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해 천하는 삼분되었다.

    219년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蜀漢),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했다.

    그는 먼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안(永安;白帝城)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임종 때에 <이 아이(後主劉禪)를 살릴 만한 가치가 없으면 그대가 나라를 차지하라>고 제갈량에게 유언했다.

    능(陵)은 성도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가 더욱 유명하다. 시호는 소열제(昭烈帝).

     

     

     

     제갈공명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양야양도(山東省沂水縣) 출신. 본명이 양(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으로 더욱 유명하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湖北省)에 살면서 밭을 갈고 독서로 소일하며 생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형주목사였던 유표(劉表)를 찾아 온 유비(劉備)는 그의 평판을 듣고 207년 제갈량이 사는 곳을 방문, 세번째에 간신히 회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고의 예(三顧之禮)>에 응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말하고, 화베이[華北(화북)]를 제압한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한(漢)나라 왕실을 부흥하기 위해 강남에 할거하고 있던 손권(孫權)과 연합, 스스로 형주와 익주(益州;四川省)를 확보하여 독립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이 계략을 기뻐하고 제갈량과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그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208년 조조군이 남하하고 있을 때 유표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종(琮)이 항복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즉시 유비의 사자로서 손권에게 달려가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적벽(赤壁)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천하삼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유비는 형주장관이 되고 제갈량도 창사[長沙(장사)] 등 3군(郡)의 감독을 맡았지만 211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그 지방 장관인 유장(劉璋)과 대립하자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 촉나라에 들어갔고 214년 유비는 청두[成都(성도)]를 점령, 익주장관이 되었다.

    221년 촉한(蜀漢)이 성립되어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보좌하였지만, 223년 위독해진 유비는 후사(後事)를 제갈량에게 부탁하고 죽었다.

    제갈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승상으로서 국사를 주재했다.

    위(魏)나라로부터 중위안[中原(중원)]을 다시 빼앗아 유씨의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吳)·촉동맹을 굳히고 남쪽으로는 윈난[雲南(운남)]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위무하여 후방의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물자 보급을 용이하게 한 뒤, 227년부터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전력을 다했다.

    출진에 앞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후주에게 올리고 우국충정을 토로한 뒤 7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이따금 관중(關中)에 진출해서 위나라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234년 우장위안 근처에서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위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와 마속(馬謖)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호는 충무(忠武)·무후(武侯).

     

     

     변검쇼

     

    처음부터 변검쇼만 하는 줄 알았더니 변검쇼는 맨 나중에 공연된다.

    공연 종목이 바뀔 때 마다  여자 해설가가 나와서 중국어로 설명을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으니 무슨 의미의 공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양쪽 구석에는 중국어가 앞에 있고 뒤에 영어가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한자는 배우의 이름을 말한 것 같다.

    단지 눈으로   발레를, 무용가의 율동을, 서커스 단원들의 묘기를 감상할 뿐이다.

    인형 춤, 해금 독주, 마약을 한 남편을 길들이는 중국여인의 이야기에 웃을 수 있으며, 마지막에 변검쇼를 한다. 변

    검쇼가 한국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기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마치 마술을 보는 듯 신기하다.

     

    고개를 좌로 돌렸다가 정면으로 돌아오기까지 0.5초 사이에 손을 대지도 않는 상황에서 얼굴의 가면이 바뀐다.

    가면이 5회 정도 바뀌는 것으로 봐서 5겹의 가면을 썼다는 것으로 보면 돤다. 

    가면을 겹으로 쓰고 있다가 손을 움직일때 당겨서 벗겨내어 얼굴의 모습을 바꾼다고 한다.

    옷을 바꿔 입는 것은 커튼 뒤에 배우가 숨어 있다가 배우가 발을 구르는 것을 신호로 뒤에서 당겨 벗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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