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제천시 송학면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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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천시 송학면
    제천이야기/아름답고 정겨운 제천 부근 여행 2009. 10. 20. 20:16

     

    왕박산의 전설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뒷산은 왕박산이라 한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새로 나라를 세워 등극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거나 하였다.
    새 조정에서 유신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했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에서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왕박산에 은신하고 성은 박씨(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낙향한 박씨는 그후 별탈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갈아 살았다 하여 왕박산 또는 왕박시루라 하게 된 것이다.

    또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동네 사람들은 왕박씨라 불렀다.

     

       출처 ;  http://www.cbtour.net


     

    옻마루의 전설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의 옻마루(漆宗)라는 동네가 있다. 이 동네가 생겨난 것은 이삼백년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옻마루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원마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동네가 생기기전 이곳은 옻나무가 많은 산골이었다. 하루는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선비는 속병을 앓다가 강산이나 유람하며 좋은 약재나 구해 보려고 길을 떠나 이곳 저곳을 지나다가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된 것이다. 선비는 몹시 피곤한데다 속도 불편할뿐더러 어디선가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비는 몹시 목이 마랐던터라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옻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속에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밑에서 맑은 샘물이 솟고 있었다. 선비는 기다시피하여 옻나무 사이를 빠져 샘물 옆까지 가서 입을 샘물에 대고 실컷 마셨다. 여느 물보다 향긋하고 시원하여 막혔던 속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물을 마신 선비는 벌렁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내물을 마셨으니 병이 나을 것이다." 선비는 잠에서 깨어 꿈을 생각하며 또 한번 샘물을 마음껏 마셨다. 선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신기하게도 선비의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선비는 샘물 먹은 일을 얘기했다. 이것을 들은 동네 사람들 중에 속이 나쁜 사람 몇이 가르쳐준 샘물을 찾아가 물을 마셨더니 그사람들도 병도 깨끗이 나았다. 이 소문이 이동네 저동네 퍼지자 병이 있는 사람이 수없이 찾아가 그 샘물을 마시고 속병을 고쳤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 약수터는 약물래기라고 불리어졌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까닭에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여 장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얼마 안있어 동네 하나가 생겨나고 약물내기 약수터 근방은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옻마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출처 :  http:// www.cbtour.net

     


     관 란 정


    종목 : 시도기념물 제 92호

    소재지 :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14-2  


    관란정(觀瀾亭)은 영월군 서면 옹정리와 충북 제천 송학면 장곡리 경계지점에 있다.

    관란은 생육신의 사람인 원호(元昊)의 호로 자의대로 물결을 본다는 뜻이다.

    강물은 혹 불어나다가 평온해지며 혹 동심원 무늬를 만들고 혹 햇살에 금빛 물결이 되고 혹 띠를 두른 듯 감싸 흐르고, 혹 화살처럼 급하게 흐르고, 혹 구름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물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와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호는 단종 때에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원주로 낙향하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이곳에 토대를 쌓고 그 옆에 초막을 짓고 영월 청령포를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조석으로 망배를 드렸던 곳이다.  


    서강가 벼랑 위에 우뚝 선 정자로, 산마루의 고색창연한 정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충의와 단종의 애사 가 어린 유적지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관란 원호가 단종을 추모하여 이곳 강물가에 설단(設壇)을 설치하고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망배(望拜)하였다 한다.

    관란정의 낡은 비각 안 목판에 붓으로 쓴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싯귀가 있다.


    간밤에 우던 여흘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보내도다.

    저 물이 거스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지난밤에 울며 흐르던 여울. 슬프게 울면서 흘러갔도다.

    이제야 생각하니 그 슬픈 여울물 소리는 임이 울어 보내는 소리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흘렀으면 내 울음소리도 님에게 보낼것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된 후 관란(觀瀾)원호(元昊)가 당종을 추모하여 이곳에서 강물가에 설단(說壇)하고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원호의 충의에 찬 애절한 사연은 글로 적어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는데 주위의 산과실과 산나물을 정성을 들여 채취하여 표주박에 글월과 함께 넣어 서강에 띄우면 빈 표주박은 거슬러 올라와 원호가 받았다고 하니 그 지극한 충절은 아무도 따를 길이 없다고 한다.



    원호(元昊1396∼1463)조선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 본관은 원주(原州). 1423년(세종 5) 지금의 원주시 개운동에서 익흥군(益興君) 헌(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8세(1423세종5년)에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고향 원주에 은거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寧越)로 유배되자 그 서쪽에 집을 짓고 단심(丹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며 지냈으며 단종이 죽자 다시 원주로 돌아와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다.

    세조가 호조참의에 제수하였으나 이도 거절하였다.

    그의 손자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신이 저술한 서책과 시문을 모두 불태워 기록이나 행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탄세사와 몽유록 등 서간문 몇편만이 전해져 원호 선생의 생활과 사상을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다.



    1463년 67세로 영월군 주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1699년(숙종 25) 그의 절개를 기리는 정려(旌閭)가 고향에 세워졌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8년)에 정간공(貞簡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함안(咸安)서산서원(西山書院)과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일화

    단종 때 생육신 중 한 분이다.

    원주 출신으로 호를 무항, 또는 관란이라 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 문종 때는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인 뒤 어린 단종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하자 원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뒤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원호는 서강가로 달려와 초옥과 단을 쌓고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유배된 영월 청령포를 향해 사배를 올리고 임금을 그리워하였다.

    또, 이곳에서 표주박에 먹을 것과 글을 넣어 서강에 띄우면 흐르고 흘러서 청령포 기슭의 단종에게까지 닿았다고 한다.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원호는 그곳에서 삼년상을 지낸 뒤 원주로 돌아가 치악산 아래 초막에 묻혀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충절에 탄복한 세조가 각별한 마음으로 호조참의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단연 거절하였다.

    그러다 손자인 숙강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신이 저술한 책과 상소문을 모두 불태우고, 아들들에게 책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 것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는 앉을 때는 항상 동쪽을 향해 앉았고, 누울 때도 항상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생을 단종만 그렸던 것이다.

    1845년 후손들을 중심으로 원호의 충절을 기리고자 그 자리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자를  짓고  원호의 호를 따서 관란정이라 하였다

     
    점말동굴


     

    점말동굴 유적은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이며, 조선계 석회암지대에 발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으로 용두산 동남향 사면 중간쯤의 병풍바위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굴을 중심으로 근처에 6개의 가지굴이 발달되어 있다.
    1973~1980년까지 8차에 걸쳐 연세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기ㆍ중기ㆍ후기 구석기문화의 뚜렷한 3개의 문화층이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과학적인 년대측정방법과 출토유물ㆍ층위퇴적 양상(層位堆積 樣相) 등으로 볼 때 전기 구석기와 중기 구석기(66,000년)ㆍ후기 구석기(18,660년)로 밝혀져 구석기시대 전시기에 걸친 문화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유적이다.
    동굴의 규모는 입구 너비 2~3m이고, 굴 안쪽이 막혀 있어 전체길이는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확인된 길이는 12~13m이며, 동굴 입구가 동남향으로 뚫려 있어 선사인이 생활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동굴유적에서는 털코뿔이ㆍ동굴곰ㆍ짧은꼬리 원숭이 등의 동물화석 20종 굴과 석기ㆍ뼈연모ㆍ예술품 및 식물화석 등 풍부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달되어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ㆍ생활상ㆍ기술발달과정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이 된다.
    점말동굴은 자연현상으로 쌓인 토양ㆍ석회암 낙반석ㆍ구른 자갈돌ㆍ석회마루 등은 퇴적층위의 구분과 기후환경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며, 사람이 밖에서 들여 온 사냥감ㆍ뼈연모ㆍ석기 등 고고학 자료는 유적의 시대편년과 선사시대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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