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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구간[시목치-피재-가지산-웅치]우리의 아름다운 강산/호남정맥 [완료] 2008. 1. 12. 17:36
2007, 05, 20 00 : 00 제천 출발
05 : 40 시목치에서 산행 시작
05 : 57 봉우리
06 : 13 제암산이 잘 보이는 묘지에서 아침 식사
06 : 35 아침 식후 출발
07 : 10 318봉
07 : 14 내리면 전망바위, 마을공동안테나
지나면 급오르막
07 : 35 만년임도[시멘트 포장]
07 : 44 임도
경주 이길용묘를 지나 가파르게 올라서면
07 : 49 456봉
오른쪽 내리막으로
07 : 58 능선마루금
이후 계속 오르막
08 ; 13 묘지
08 ; 35 용두산
산불감시카메라.
용두산까지는 제암산이 잘 보임, 월출산도 잘 보임
08 : 48 병무산
08: 48 금장재
09 ; 10 관한임도
이후 오르막
09 : 22 헬기장
09 : 32 511봉 , 헬기장
09 : 48 헬기장 93- 6-13[병무산]
09 ; 55 헬기장
이후 계속 내리막 후 다시 오르면
10 ; 35 384봉. 주변에는 참호
10 : 50 피재[2차선 아스팔트]
오른쪽으로 100m 정도 가면 싸리나무 식당[061-862-3511]
싸리나무 식당에서 식수 보충, 맥주 한병 마시고
11: 05 피재 출발
피재에서 405봉까지 오르막
11 : 25 능선마루
점심 식사 25 분
12 : 05 405봉
이후 계속 내리막
12 : 12 장생우산 갈림길
이후 가지산까지 오르막
12 : 53 가지산 갈림길
가지산 정상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와야 함
13 : 00 가지산[진짜 가지산]
13 : 14 460봉 [장흥군에서 이정표 세워 놓은 가지산]
장흥군에서 세워 놓은 정상 표지판이 엉터리로 되어 있음.
표지판을 세우기 편한대로 아무 곳에나 세워 놓았음
13 ; 47 장고목재
임도,
14 : 05 450봉[ 장흥군에서 세워 놓은 삼계봉]
14 : 21 삼계봉 [진짜 삼계봉]
삼각점[청룡 307, 2001. 6 재설]
14 ; 51 삼면봉[땅끝기맥 분기점]
헬기장 [93-6-1]
14 : 58 헬기장[93-6-2]
15 : 08 깃대봉[448m]
15 : 29 국사봉 [499m] 진짜 국사봉
15 : 37 헬기장
15 : 43 임도
15 : 59 465봉
16 : 04 임도
16 ; 18 476 봉
국사봉[ 장흥군에서 세워 놓은 표지]
17 : 10 곰재
제암산,
어느 지역의 산을 다니다 보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유독 우뚝 솟아 있는 산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주를 지나다 보면 관산이 있는데 이 산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으나 모든 주변의 산들을 아우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장흥에서는 제암산이 그런 산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산의 이름도 관산의 冠 은 갓을 쓰고 있어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태이고 제암산은 임금의 형태를 하고 있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닐까.
제암산은 지난 구간 일림산을 오르면서 보이기 시작한 것이 이번 구간 용두산을 지날 때까지 계속하여 크게 보이고 가지산 정상
에 올라서서도 멀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주흘산이 아주 멀리서도 보이고 또 백덕산이 아주 멀리 있는 곳에서도 보이듯이 말이다.
제암산 정상의 바위는 어느 장소에서 보더라도 멀리까지 조망이 된다.
제암산은 이 부근에서 제왕의 산답다.
오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돼지만도 못하고
지난 구간 제암산을 내려오면서 헤비가 묻는다.
“ 형 다음 구간 어디로 가 ” 고 물어서 건너편 능선을 가리키며
“저리로 해서 저 끝에서 한 바퀴 빙 도는데 ” 하였더니 그 능선을 바라 보고난 헤비가
“ 형 다음에 가지 말까. 저 산은 작아도 오르락 내리락 너무 많아 힘들겠는데 ..... 다음 구간 빠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한다. 그
당시 “설마하니 힘들어도 얼마나 힘들까”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늘 산행을 하면서 너무 힘든 산행을 하였다.
오르내림은 얼마나 많은지.
그 깊이는 얼마나 깊은지 ... 아주 죽을 고생을 한 구간이었다.
지금까지 대간과 정맥 구간을 지나면서 가장 힘든 구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머리 위가 비행기가 다니는 길인 모양이다.
저 먼 남쪽나라에서 오건 아니면 제주도에서 오건 비행기 소리는 쉬지 않고 들린다.
그러나 고개 들어 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양을 볼 수가 없다.
그냥 산행을 계속하다가 쉬면서 고개를 들 수는 있겠지만 산이 너무 가파르다.
오를 때는 코가 땅에 닿을 것 같아 고개를 들면 뒤로 넘어 질 것 같고, 내려 갈 때는 경사가 너무 급하여 고개를 들었다가는 허공에
구를까 겁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5학년 진선[강원장 딸]이가 중얼거린다.
“아저씨 이 세상에서 돼지가 가장 불쌍해요”
“왜 ”
“왜냐하면 돼지는 고개를 들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하늘을 보지 못해요. 평생 땅만 보고 살아야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돼지.
죽을 때까지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고 살아야 하는 돼지.
오늘은 내가 완전히 돼지가 된 기분이다.
산 능선에 섰을 때 멀리 있는 산 마루금을 볼 수는 있었지만 머리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를 볼 수가 없었으니까.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고 싶어도 고개 들기도 귀찮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돼지만이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너무 힘들면 하늘을 쳐다 볼 기운조차 없다는 것이다.
엉겅퀴를 찔레꽃이라 써 놓았네..
멀고도 먼 길
버스가 감나무재에 도착하기 전에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
차창 밖은 이미 날이 밝은 탓인지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모두들 산행준비를 마치고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산으로 줄달음친다.
지난 번 구간 시목치 도착 후 길 가에 많이 있던 난을 수집하고자 찾아 나서려 하였으나 선두는 이미 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빨리
따라 오라고 소리 지른다.
처음부터 계획이 빗나가기 시작한다.
오늘 시작은 벌목을 하여 놓은 덕분에 시야가 확 트인 곳을 먼저 지나간다.
바로 앞의 제암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지난번에 지나갔으면서도 저 산이 무슨 산이야 하고 묻는 산군도 있다.
첫 봉우리인 349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을 올랐는데 봉우리에 깔딱 오르자마자 다시 아래로 곤두박칠한다.
2 달 전에 낙동정맥 종주를 완주한 분들이 우리의 낙남정맥 완주를 축하해 준다.
하나의 정맥을 다닐 때 어떤 의무감이랄까, 사명감이랄까 이런 것으로 가는 것 같은데 나중에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여기서 시작해서 저기까지 갔다는 것 뿐..... 사진을 돌려 보아도 저기가 어디지..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니까.
338봉에 오르며 묘지 앞에서 아침상을 차린다.
밥맛도 없다.
항상 느끼는 것인지만 산에서 밥은 꿀맛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왜 꿀맛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냥 때가 되었으니 먹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녹다운 될 것 같은 예감에 먹는다.
그러니 찬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
바로 앞에는 제암산이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이 묘 안에 누가 누워 있는지 모르나 바로 앞에 멋있는 산을 항상 바라보고 있으니 죽어서도 기분은 좋겠다.
348봉을 지나면서 탁 트인 전망바위에 서면 멀리 월출산이 보인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공동안테나가 있는데 동네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안테나를 세웠을까 궁금해
진다.
안테나 세우기 위해 동내 사람 전체가 매달렸을 것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요즈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70년대 처럼 살까.
만년임도에 도착한다.
시멘트 길 포장임도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넘나들었겠지만 지금은 용도가 무엇일까.
이곳을 조금 지나면 임도가 잠시 나타나고 경주이길용묘를 지나는데 큰 벼슬을 한 양반 같지는 않은데 무슨 빌어먹을 묘소는 그렇
게 크게 만들었을까. 이 묘소 만드느라고 임도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우리가 산에 다니다 보면 산소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놓
은 길을 많이 볼 수 있다.
최소한 경운기 하나는 충분히 다닐 길을 만들어 놓으니 그러기 위해서 수많은 나무가 없어지니 이것 또한 불행이 아닐까. 오늘의
종착점인 웅치에 가면 내려가기 전에 또 다시 큰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묘도 벼슬을 하지 못한 양반이 후손들 잘 만난 덕분에 큰 자
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또 들어가기 위한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 할까.
만년임도에서 용두산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숨이 턱에 닿도록 올라야 한다.
땀이 비가 오듯 흐른다.
모자를 쓰지 않았더니 머리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흘러 산행을 하지 못할 정도이다.
용두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용 카메라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위에 나무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삼각점이 있을 것 같아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늘이 없는 탓인지 일찍 올라 온 팀들은 건너편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벌써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바로 뒤에 오는 팀들이 오자마자 그 팀들은 잽싸게 가버린다.
잠시라도 둘러 앉아 물 마실 여유도 주지 않는다.
용두산에서 급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금장재에 도달한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고개이다.
금장재에서 병무산 오르는 길도 경사가 무척 심하다.
금장재에서 피재에 이르는 구간은 헬기장을 몇 개 지나야 하는데 이곳에 헬기장이 몇 개 씩 있는 것이 이상하다.
아무 이유 없이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또 마지막 헬기장은 지름길로 가면 거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다.
피재
전설대로 라면 말 그대로 피가 흐르는 피재다.
그러나 피재에 내려섰을 때는 여느 고개와는 상당히 다르다.
근래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개가 절개지를 만들어 차가 지나가도록 만들지만 이 피재는 고개 정상이 상당히 넓다.
거의 평지에 가깝고 논밭이 넓게 존재한다.
그냥 차로 지나치면 고개인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이다.
피재를 지나 405봉을 오르면서 아래로 보이는 피재는 아늑한 동네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것 같이 포근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피재에는 아주 커다란 가족묘지가 많이 보인다.
묘지를 왕릉처럼 가꾸어 놓았다.
그것도 몇 군데가 된다.
묘지 앞까지 차가 갈 수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묘소 앞의 잔디는 골프장의 잔디처럼 가꾸어져 있다.
골프 치는 사람은 그 위에서 골프 치고 싶을 것이고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내가 어릴 적 같으면 청춘남녀의 연애장소로도 충분한
장소이다.
피재에는 싸리나무 식당[061-862-3511]이 있는데 백반 정도는 준비를 해 준다.
또 시원한 맥주와 소주는 마실 수 있다.
맥주는 캔 맥주가 아니라 병맥주만 판다.
캔 맥주를 찾았더니 다음부터는 캔 맥주를 내려야 하겠다고 아주머니가 이야기 한다.
마당 한 가운데 늘어진 호스에서 물을 틀어 물을 보충한다.
오늘 날씨가 무척 더운 탓인지 물을 무척 많이 필요로 한다.
오늘 4리터의 물을 가지고 왔는데도 부족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뒤에 따라오는 권사장, 표회장은 이 싸리나무 식당에서 소주와 맥주를 먹다가 중간을 포기하고 주인장한테 이야기하여 차를 타고
장고목재까지 왔으니 약 3시간 산행은 빼 먹은 셈이다.
그런데도 장고목재 올라오는데 바리게이트가 있어 걸어오느라고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니 땀 흠뻑 흘리며 낑낑대며 걸어 온 우리가
보기엔 그냥 한탕해도 시원찮을 일이다.
피재 고개 마루를 지나는데 길옆에 어느 무당이 고사를 지냈는지 과일이 무척 많이 차려져 있다.
대부분의 제상이 고기도 있고 술도 있고 과일도 있어 먹을 것이 상당히 많은데 이 무당은 과일만 잔뜩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낸 모양
이다.
주위에 흰 페인트로 경계 표시를 하여 놓고 토마토, 참외, 사과 등등해서 여러 접시를 차려 놓았다.
과일마다 두 접시씩 차려 놓았다.
그 중에 가장 먹기 편한 토마토를 집어 들어 깨물어 먹는다.
땡볕에 놓인 탓인지 뜨뜻하다.
하나를 집어 그린과 산도깨비 부인에게 건네주니 기절하듯이 놀란다. 전부 안 먹는단다.
결국 한 개는 그 자리에서 내가 먹고 나머지는 두 개는 배낭에 넣어 달라고 하여 지고 가다가 헤비에게 하나를 주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산행 하다가 종주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갔을 즈음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것 같을 때 간단하게 요기를 하니 얼마나 도움이 되
던지. 이 맛있는 것을 왜 안 먹는다고 손사래를 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귀신도 결국 사람인 것을 왜들 경계를 하는지... 죽음도 우리의 삶의 일부 인 것을
보림사
405봉을 지나 장평우산 갈림길로 내려가는 도중에 전망바위에서 왼쪽 아래를 보면 평지인데 커다란 절을 볼 수 있다.
그 절은 보림사인데 아주 역사가 깊은 유명한 절이다.
역사가 오래이다 보니 국보급 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또 절 자체는
전남유형문화재 85호이며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보조선사창성탑 보물 157호
상교정본자비도량기법 9-10 권 보물 1252호
보림사의 내력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지금부터 1천 3백여 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것은 보조국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 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지산사였다.
그 뒤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에서 헌안왕의 뜻을 받아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열었다.
880년 체징이 입적할 때에 무려 800여명의 제자 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입적 후에 헌강왕이 절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다.
화엄종 사찰로 출발해 선종사찰로 바뀐 것이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 초 세조 3년 (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 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적혀있다.
▷ 보림사 창건설화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 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 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 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
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
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보림의 하나라고 한
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 유사"를 지은 일
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 후 여
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
을 빼고 20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
은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보림사에서 처음 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
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
되어 정조 때(1780년)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
보통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 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
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원형대로 복원 (52평)되었으며, 외호 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 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 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칸, 측면4칸 의 팔작지붕집으로 겉 보기
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
그 뒤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비가 있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비와 부분 손상 된 부도는 모두 보조선사 입적 후 세워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절 앞마을 뒤 잡목 숲 안에 있는 동부도와 절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서부도들이 선종
대 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 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장흥군
여행정보에서]
장평우산 갈림길에서 가지산 정상까지는 50분 정도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가지산 갈림길에 도착을 한다. 가지산 정상은 정맥 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갈림길에서 급경사를 5~ 6 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오르는데 정상에서의 조망은 아주 멋지다.
멀리 월출산이 보이고 제암산 그리고 오늘 종주의 마지막인 국사봉이 커다란 무학산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모든 것이 한 자리에서 조망되는 곳이다.
바람이 많이 불면 정상의 암릉이 크지 않아 약간 위험하다.
정상에서 갈림길로 다시 원위치하여 앞에 간 팀을 따라 부지런히 달려가는데 바로 앞에 가지산 정상 표지판이 또 있다.
분명 460봉이건만 이 자리에 정상표지판을 세워 놓다니 한심스럽기 만하다.
장고목재에 도달한다.
장고목재에서 450봉을 오르는 길이 경사가 얼마나 급한지 코가 땅에 닿는다.
정상마루에 오르자 장흥군에서 세운 정상표지판이 나타난다.
이 빌어먹을 자슥들이 450봉에다 삼계봉 정상표지판을 만들어 놓았다.
삼계봉 정상은 여기서 15분 정도 더 가서 삼각점이 있는 곳에 있는데 말이다.
삼계봉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삼면봉으로 향한다.
이곳은 산죽이 아주 심하여 산행하기 아주 나쁜 지역이라 알려져 있지만 누군가 주변 정리를 말끔하게 하여 놓아서 수월하게 진
행할 수 있다.
땅끝기맥
삼면봉에 도착하면 한쪽 구석에 땅끝기맥 분기점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넓은 헬기장과 많은 이정표가 혼돈스럽게 하지만 한쪽 구석을 보면 뚜렷하게 난 길이 하나 있고 그 입구에 땅끝기맥 표지석이 있
다.
땅끝기맥은 지금 이 자리인 호남정맥의 삼면봉에서 갈라져 나와 영산강의 남쪽 벽을 따라 진행하다가 벌매산에서 영산강을 버리
고
두륜산, 달마산을 거쳐 땅끝 사자봉에 이르는 도상거리 120km 의 산줄기로서 땅끝기맥은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고 태백산맥은
없다.
이 땅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 [조석필 저]에서 신경표를 윤택하기 위해 명칭이 없는 산줄기를 기맥으로 부르자고 하였고 그 중
땅 끝에 이르는 이 산줄기를 땅끝기맥이라 명명 하였다.
이 삼면봉에서 깃대봉까지는 조금 수월하고 깃대봉에서 한동안 내리막을 타다가 크지 않은 능선을 타고 가면 이제 마지막 봉우리
인 국사봉에 도달한다.
그러나 마지막 봉우리라는 것 도 잠시 일 뿐.....
끝난 것 같았지만
우리나라에는 국사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 무지 많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북 제천 봉양의 국사봉, 거제도의 국사봉, 경남 의령의 국사봉, 경북 문경의 국사봉, 충남 금산의 국
사봉 .... 이외에도 무척 많으리라 본다.
이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들의 특징은 주위 봉화대가 있다던가 아니면 주위 석축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있는 국사봉은 그런 흔적은 없는 것 같다.
국사봉 정상에 서니 모두들 너무 좋아한다.
이제 내리막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좋아한다.
왜냐하면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진이 빠지도록 걸었으니까 마지막 봉우리에 서 있는 기분이 얼마나 좋았을까.
배낭을 뒤져 빵이 하나 남아 있어 물과 함께 먹는다.
다른 사람은 먹으라고 주어도 먹지를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것 빼앗아 먹기가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먹는 것도 귀찮아서인지 모르나 무조건 안 먹는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
든다.
그러니 내 혼자 그냥 먹을 수밖에...
국사봉 정상에서 내려가는데 헬기장을 지나 아주 급한 경사를 내려가면 이제 끝인 줄 알았더니 다시 올라간다.
20분 정도를 쉬지 않고 475봉까지 또 다시 올라야한다.
아주 진을 다 빼어 버린다. 올랐다가 다시 아래로 처박힌다.
임도를 건너 평탄한 길을 가다가 또 다시 솟구쳐 오른다.
476봉까지 오르는데 모두들 지쳤다.
중간에 모두 주저앉는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하다.
476봉에 섰다. 그런데 미치고 팔딱 뛸 일이 일어났다.
국사봉 표지판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했나 싶어 아무리 지도를 살펴보아도 이곳은 476봉이지 국사봉이 아니다.
이 빌어먹을 자슥들이 있나. 모두들 기절초풍한다.
이곳에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데다가 자갈까지 많아서 내려가기 무척 불편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가기에는 너무 힘에 부친다.
일부는 버스에 막걸리 있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그럴 힘조차 없는 것 같다.
내려가면 끝인 줄 알았더니 한 바퀴 빙 돈다.
산으로 다시 기어 올라가려나 하였더니 340봉에서 그냥 내려선다.
중간에 큰 묘지가 있어 묘지 조성하느라 닦아 놓은 굴삭기 길을 따라 웅치재에 도착한다.
웅치재에 도착하였는데 휴게소는 건너편에 있어 휴게소까지 아스팔트길을 300m 정도 진행해야 버스가 있는 휴게소에 갈 수 있다.
웅치휴게소
웅치휴게소는 생각보다 크다.
주위에 웅치 모텔이 있는데 말이 모텔이지 호텔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휴게소에는 간단한 음료와 몇 개 안 되는 과자 정도는 있다.
식사는 육개장이나 순두부 백반이 있는데 육개장은 그곳에 무엇을 넣었는지 매워서 한 술도 뜨기 힘들 정도로 맵다.
너무 맵다고 하였더니 아들 녀석이 국에다 물을 떠다 붓는다.
짜다 해도 물을 떠다 붓는다. 맛대가리 없게스리...
전라도라고 음식 맛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 휴게소에 나이 많은 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손님들한테 이것저것 챙겨 주는데 아들놈은 영 아니다.
이 휴게소에서 식사하는 것은 아주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엉터리 표지판
이번 구간에는 장흥군에서 세워 놓은 무척 많은 표지판을 볼 수 있었는데 너무 엉터리로 세워 놓았다.
예를 들면 가지산 정상에 세워 놓아야 하는 가지산 정상 표지판을 460봉에 세워 놓았다.
삼계봉 표지판은 450봉에 세워 놓았으며 국사봉 표지판은 476봉에 세워 놓았다.
장흥군청 공무원들이 결제를 할 때 한번이라도 산에 올라 와 보고 확인을 한 후 결제를 하였으면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텐
데 무조건 일을 주고, 돈도 주고 어디에 어떻게 세웠는지 획인을 하지 않은 공무원들의 전형적인 태만을 보고 있다.
어느 시군이건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의 시군에서는 자기 고장의 유명한 산에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기 고장의 자랑거리가 되고, 내세울 수 있는 것임이 틀림이 없으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상당수가 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한테 이것을 하청을 주는데 문제가 있다.
차라리 산악회에 일임을 하면 아주 정성을 드려 만들어 놓았을 텐데 말이다.
산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청을 주니 편한 대로 아무 곳에나 세워놓고 사진만 찍어 제출하면 돈을 주는데 문제가 있다.
아니다 라고 항변하면 할 말은 없지만 지금 산에 되어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뻔할 뻔 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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