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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우리나라 구석구석/국내여행 2025. 5. 26. 11:02
신륵사는 여주시 봉미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
조계종 2 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나옹 화상이 입적할 때 오색ㄱ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을 하였기에 절이 번창했다고 한다.극락보전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절 안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1678년 [조선 숙종]에
지어진 후 1797년[정조21] 에 수리하기 시작하여 1800 년[정조 24] 에 완공되었다.
극락보전은 앞면 3 칸, 옆면 2 칸이며 지붕은 8 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 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라한다.
안쪽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1791 호] 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 불단
이나 어좌 위에 목조검물의 처마구조물처럼 만는 조형물]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1773년[영조 49]에 제작한 병풍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화상이 직접 쓴 것이라 전해오는 "천추만세 " 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이 있게
쓰여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리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천추만세는 현재 불교중앙박불관 수장고에 위탁 보관중이다
신륵사 극란보전은 조선 후게에 크게 수리 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목조아미타여래 삼존상
신륵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여래 좌상으로 아미타여래를 주심으로 한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여래는 앉아 있고, 양옆의 보살은 서 있는데, 유난히 높은 육계, 이국적인 얼굴, 옷 주름 표현의 독
창성 등의 조형적인 특징은 다름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불상 내부에서 복징 [불상을 만들면서 불상 안에 넣는 사리와 여러가지 유물을 일컫는 말] 원문이 발견 되
어 1610 년[ 광해군 2년 승려와 일반 백성 백여명이 마음을 모아 삼존상을 만든 것이 밝혀졌다.
특히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상의 이름이 확인되어 17 세시 초기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자료에 중요한 자료
이다.삼장보살도
신륵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당 권속[ 부처님이나 대중을
따르며 불법을 닦는 대중] 들의 모임이 통일감이 있고 안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주된 인물을 비롯하여 각 인물의 묘사도 뛰아날 뿐 아니라 적색과 녹색 두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많은
인물들도 잘 드러나게 표현한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경기도에 전하는 삼장보살도 가운데 제작연대가 가장 앞선 작품이다. 18 세기 경기도를 대표하는 화승 각총이
주도하여 그린 불화답게 전체적인 구성, 인물의 묘사 등이 뛰어나 18 세기 중엽 탱화의 화풍과 형식 변화를 이
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600 년 된 향나무
조사당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 칸, 옆면 2 칸 규모의 팔각지붕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는 봉미산 시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는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당 중앙에는 지공화
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의 영정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지붕 위 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라 한다.
양면에는 6 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였고. 옆면에는 앞 한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사당은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조선 전기의 조각기법이 드러난 건물이다.삼화상진영[경기도 문화재 167호]
신륵사 조사당에 본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에는 지공화상, 오른쪽에는 나옹화상, 왼쪽에는 무학대사를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좌상
이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삼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225 호]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 2 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개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신라나 고려의 양식과는 전혀 다르다.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로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 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
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탑의 안정감을 높혀주며 ,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는 꽃 모양이 새겨진 기둥
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터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 부분의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난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하며 전체적으로 국보 2 호인 원각사지 십층 석탑과 돌
의 재질, 조각기법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1472 년 [조선 성종 3]에 대규모로 새 단장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에 함께 세원진 것으로 보여진다.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은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에 몇기가 남아 있
다.
이 탑은 2 단으로 기단을 쌓고, 다시 3 단을 쌓은 후 여러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 탑신부는 흙벽돌로 6 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가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는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들이 매우 얇아 전체적인 인상이 독특하다.
지면 밑면의 받침은 1 ~ 3 층이 2단. 4 층 이상은 1 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위로도 1 층은 4 단, 2 층 이
상은 2 단 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얇다.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탑의 부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 그 비에
1726년[조선 영조 2]에 고쳐 지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탑의 세워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벽돌 문양을 근거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인데 그를 초념하여 세운 정자이다.
신륵사 삼층석탑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3 층 석탑으로 , 신륵사 다층전탑 근처의 강변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
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와 양주를 새겼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에는 연꽃 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3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1 층과 2 층의 탑신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나 심하게 닳은 편이다.
그 위에는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
에 새겨진 받침은 3 단이나 4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 층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층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구룡루 간판,극락보전 간판까지 한번에 다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