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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4대 박해 [원주교구 주보 1820호]글/생활 속의 신앙 2012. 9. 23. 18:47
신유박해
1801년 1 월 10 일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 월 22 일 반포한 " 척사윤음"
으로 끝났다.
2 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 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 되었다.
박해는 3 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하여 4 월 순교하였다.
전주에서 3 월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유항검, 유관검, 윤지충 등이 체포 되었고, 9 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 당했다.
신유박해는 " 황사영 백서사건" 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10월 참수 되었으며 정약용, 정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 되지 않아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 되었다.
황사영이 전한바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 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1839년 3 우러부터 10월까지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여 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명인데 이중 70여명이 시성되었다.
기해박해의 표면적인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이었지만 시파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조씨가 일으킨 정치적인 갈등이라 볼 수 있다.
5 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화를 찾는 듯했지만 7 월, 천주교 신자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
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 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 년이 지난 1846년 6 월 5 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 월 20일 종결되었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 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되었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 신부는 9월 16 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 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 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등도 곤장으로 순교
하였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불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병인박해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이다.
일반적으로 1866년 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기간으로 설정한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 천명에서 1 만며응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 만이 시성되었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 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 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 되었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었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의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대략 1 만명 내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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