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한민족의 聖山 . 백두산 :: 제천 감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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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의 聖山 . 백두산
    이 세상 구석구석/중국 백두산 2009. 8. 19. 10:10

     

     

     

     

     

     

    2009, 08, 13   ~ 08. 16 [3박 5일]

     

     

     

    밤 10 시 청주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현지시간으로 11 시 20분에 연길공항에 착륙한다.

    그곳의 시간은 한국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으니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2 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입국 수속을 받는 공항이 너무 어둡다.

    시골 어느 한적한 공항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똑같이 계속된다.

    공항도 어둡고, 시내도 어둡고, 호텔내도 어둡고 모든 것이 전부 어둡다. 

    공항내의 직원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라 그런지 대부분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는데 먼저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하니 당황스럽다.

    전 세계공통어인 영어도 사용하지 않는 인간들이 한국말을 사용하다니..

    공항을 빠져 나가 시내로 버스가 들어가면서 보여 준 주위의 풍경은 이곳이 중국 땅인지, 한국 땅인지 모를 정도로 간판은 한글은 위에, 중국어가 아래에 쓰여 있다.

    조선족 자치주이기 때문에 자치주의 언어를 먼저 기록한다고 한다.

    길거리의 모습이 우리의 시골에 와 있는 착각이 든다.

    중국은 소수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언어 우선, 다자녀 출산 허용 등으로 많은 혜택을 준다고 한다.

     

     

    길림성의 역사

    이곳 길림성은 기원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이후 약 250년 정도는 발해가 통치를 하였고 이후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청나라 때 영고탑이  이주하면서 길림성이 설치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족의 이주는 철저히 금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해주가 베이징조약으로 1860년에 러시아로 넘어가면서부터 청조(淸朝)는 한족의 이주를 허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동성지역에서 건너왔다 고 하며,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한족이 이 지역의 주된 그룹이 되었다.

    1932년에는 일제의  만주국이 세워졌으며, 일제가 1945년에 패망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하여 다른 중국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길림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에 거주한다

     

    연길

    연길은  명승지가 없지만, 백두산을 찾을 경우 경유지로 들르는 곳인데 중국 정부에서 2008년 8월 백두산 아래 창바이 공항 문을 열면서 중국인들은 대부분 이 공항을 이용하며 외국인들만 연길 공항을 이용하는 것 같다.

    아마 오래지 않아 창바이 공항에 국제선이 뜨면 연길 공항도 손님이 줄어 들 것이다.

    연길의 날씨는 봄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고, 여름에는 덥고 비가 많이 내린다.

    가을은 서늘하고 비가 적으며, 겨울은 길고 몹시 춥다.

    연길의 연평균 기온은 5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510mm 이다.

    또한 중국에서 소수민족 종합대학으로는 가장 먼저 세워진 연변 대학이 있으며, 학구열은 아주 높아 한국인의 국민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시내를 지나면서 본 연길의과대학은 그 크기에 기가 질릴 정도로 크다.

     

     

     

    중국을 몇 번 다니면서 본 가이드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조국은 중국이다.

    굳이 따진다면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국 사람일 뿐이며 그들의 가치관은 중국에 세뇌되어 있는 것 같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이곳 연길 부근은 생활양식과 주택 등 그들의 전통 양식은 한국보다 훨씬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의 옛날을 보기위해서는 연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골은 아직도 초가집이 보이는데 그 옆에는 초가집을 함석지붕으로 고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 것을 보면 머지않아 촌스런 모습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시골집들을 보면 처마에 날개가 있으면 조선족 집이고, 날개가 없는 집은 한족들의 집이라 한다.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골의 모습,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가면 생활수준이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이곳은 우리의 60년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북한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가고 싶으면 그날로 허가증이 나와서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또 한가지는 대부분 조선족 3, 4 대 때문인지 몰라도 중국에 많이 동화된 모습이다.

    축구경기를 한국과 중국이 하면 그네들은 중국을 응원한다는 사실이다.

     

    2일째 

     

    이도백하 가는 길

    천둥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어 밖을 보니 새벽 5시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길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고 자전거 리어카, 삼발이 자동차도 보이고 일정시대에 사진으로 보았던 인력거와 비슷한 자전거도 보인다.

    택시는 전부 똑같은 크기에 초록색을 칠한 색깔도 똑같은 것이 다닌다.

    택시도 국가 소유인 모양이다.

    아침 식사 후 백두산을 가기 위해 이도백하로 향한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서는 이도백하를 가던지 , 송강하를 가던지 해야 백두산 아래까지 갈 수 있다.

    아트막한 산 위에까지 농작물은 심어져 있는데 대부분 콩과 옥수수이며 옥수수의 1/3은 북한으로 수출되고, 1/3은 사료용으로, 1/3은 국가에 세금으로 낸다고 한다. 끝없이 보이는 들판,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두고 만주벌판이라 했던가.

    버스가 시골 물건 파는 곳에 들른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휴게소라 하여 내렸건만 파는 물건도 버섯 종류,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 과일, 그런데 산 사과라 하는 것은 한 입에 딱 들어가는데 의외로 맛있음, 동물생약, 잡곡 종류 등을 팔고 있는데 딱히 호감이 가는 물건은 없다.

    휴게소하면 대부분 화장실이 먼저 필요해서 들르는 곳이니 화장실을 찾는데 이곳 화장실이 진짜 기가 막히다. 아직도 이런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문은 없고 밑에는 뚫려 있고, 여자들이 들어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온다.

     

     

     

    연길에서 2 시간 30분 정도 가면 유명한 청산리 전적지를 지나게 되는데 아주 커다란 고개이다.

     

      * 청산리 전적지

     

    청산리대첩은 김좌진 장군 휘하의 독립군이 일본의 관동군과 더불어 치열한 혈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의 현장이 백두산에서 동북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은지 10년 만에 거둔 가장 빛나는 전과였다.

    가이드 말로는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라면서 그 당시 죽은 일본군의 숫자를 세어 볼 수는 없고 머리만 잘라 담았는데 수레로 열네 수레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일본의 관동군은 이때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 후 병력을 재정비하고는 엉뚱하게도 동북 전역에 살고 있는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 하였다.

    현재 청산리에는 항일전적비만 묵묵이 서있을 뿐이다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는 고도가 1,000m가 넘는 마을이며 연길시에서 4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는데 고속도로라 하는 4차선도 시멘트길이 기술 부족인지, 아니면 차가 시원찮은 것인지 몰라도 승차감이 아주 좋지 않다.

    이도백하에 들어서자 반겨 주는 것은 쭉쭉 뻗은 미인송이다.

    이 미인송은 자신이 밑에 있는 가지를 치면서 자라기 때문에 한마디로 쭉쭉빵빵 자란다 한다..

    이 소나무는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소나무이며 여인다리를 연상하듯이 하늘로 곧게 뻗은 미인송은 장백송 또는 백적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수간이 붉으며 곧게 뻗었고, 아래에는 굵은 줄기만이 올라가고 위에서만 확 퍼져 소나무 중의 미인으로 장백산의 특유하고 진귀한 소나무로 평가되어 세계적인 천연기념물로 중국 정부에서도 보호하고 있어 만약 자르면 살인행위와 똑같은 처벌을 받으며 교도소에 간단다.

    주변 전체 이 소나무가 자라고 있건만 나무에는 차에서 내뿜는 먼지와 매연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것부터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에 있는 호텔은 여름 3 개월 장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호텔이라 하는데 타산이 맞는지 모르겠다.

     

     

     

     

    백두산

    이도백하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백두산으로 향한다. 점심 식사 때 맥주 한 병을[5원] 시켜 마셔 갈증 해소를 한다,

    중국에서 물 먹는 자체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나는 중국에 가면 항상 맥주를 음료로 대신한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산문 입구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산림 사이를 내내 지나는데 그 경치가 장관이다. 이곳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너무 울창한 숲을 보면서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감탄을 했으니까.

    장백산 산문 입구 주차장에서 백두산을 오르는 짚차를 탈 때 까지 고통의 연속이다.

    산문 입구 주차장에서 장백산 입구까지는 걸어서 10여분 가야 하는데 지나는 차의 먼지와 흙 등등 걸어가기에는 너무 짜증스럽다.

     

     

    장백산 입구에서 사진 찍느라 폼 좀 잡고 건네주는 입장료를 보니 68원이다.

    나가면 다시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짚차 타는 주차장까지 30분을 이동한다.

     

     

     

    이곳 짚차 타는 주차장에서 천지로 가는 길과, 장백폭포 가는 길이 갈라지는데 천지를 갔다 와서 장백 폭포를 가던지 아니면 장백폭포를 먼저 갔다 와서 천지를 오를 수 있다.

     

    짚차 타는 곳은 완전히 난장판[북파 가는 길]

    백두산 오름은 중국쪽에 북파, 서파 오름이 있고 북한에 동파, 남파 오름이 있다.

    중국쪽은 우리가 지금처럼 오를 수 있는 곳이고 북한쪽은 남파 오름은 4호 경계비가 있는 방향이고, 동파 오름은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인 장군봉을 오르는 길이다.

     

     

     

    백두산 북파 정상까지 가는 짚차를 타기 위해서 이 더운 날씨에 꼬박 50분을 서 있었다.

    차라리 순서를 기다리느라 서 있었다면 불만이라도 적겠지만 중간에 새치기하는 중국인들, 남이야 다치건 말건 뒤에서 밀어 틈 만 나면 치고 들어오고, 진짜 어떤 염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우리네 60년대의 생활상을 보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기차를 타러 가면 먼저 자리를 잡으려고 기차의 창문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그 모습과 똑같다. 경찰 몇 명이서 새치기 하는 사람을 단속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줄을 서서 기다려 표 점검을 마치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차가 오면 순서대로 타면 될 텐데도 멀리 오는 차를 보고 뛰어가서 달리는 차의 문을 잡고 같이 이리 저리 뛰어 다닌다.

    삶에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고  삶의 질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또다시 입장료를 내는데 80원 이다.

     

     

    어찌어찌하여 짚차를 얻어 타고 백두산을 오르는데 질리게 운전하는 바람에 차 안에 탄 7 ~ 8 명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난리도 아니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기사는 더 신이 나서 휘돌리니 사람들 정신을 홀딱 빼 놓는다.

    내가 탄 기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운전하는 기사들이 전부 그 모양으로 운전을 한다.

    내려 올 때는 사고 날까 봐 걱정이 되는지 천천히 내려 와서 안정을 되찾는다.

     

     

    오늘의 일정을 마쳤을 때는 다른 팀들은 다 내려가고 우리가 거의 마지막에 내려 왔는데 산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짚차들을 보니 100 대 이상이 움직이는 것 같았으며 장백폭포를 오르내리는 것은 짚차가 아니라 버스가 오르내려 크게 불편한 것은 없다. 

    짚차에서 내려 모래 언덕 같은 곳을 오르니 백두산의 수많은 봉우리에 둘러싸인 천지가 나타난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바람에 날리는 모래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다.

    또 아래로 보이는 장백폭포 계곡이 어느 것이든지 집어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으며 이곳에서 미끄러지면 그 커다란 입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다.

    백두산은 처음 개방 했을 때만 해도 한국인들이 더 많이 찾았으나 현재는 여름 3 개월 동안 약 40만 명이 찾는데 7만5천명은 한국 사람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백두산은 중국인들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 같은 예감이다.

     

     

     

     

    백두산의 기후

    백두산 지역은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그 원인은 해양과는 거리가 가까우며,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이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300mm이며, 연 강수 일수는 200일쯤 되고, 특히 우기는 7, 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연 이틀을 구름 한 점 없는 천지를 구경했으니 이거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닐까.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7.3도이고 극단적인 최저 기온은 -44도이다.

    9월 초순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온통 겨울 설원으로 변한다.

    계곡엔 눈이 매우 두껍게 쌓여 이듬해 7월에도 채 녹지 않은 눈을 볼 수 있다.

    서풍이 강한 백두산은 연 평균 풍속이 초속 11.7m에 달하고 8급 이상의 폭풍 일수는 250일이나 된다.

    폭풍이 가장 많은 달은 12월 한 달 내내 계속 되고, 최대 풍속은 초속 70m 가 넘을 때도 있다.

     

     

     9월이면 벌써 첫눈이 내리는 아주 추운 곳으로 겨울철에는 특히 눈보라가 아주 심해 겨울 산행은 전문가들만 다니며 일반인들의 접근은 6월 - 8월이 가장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보통 이 기간만 개방을 한다.

    근자에는 한국인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기 위해 5월이면 제설 작업을 통하여 백두산 등정을 원하는 한국인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고 한다..

    평균적으로는 백두산 입산이 6월말에서 9월초의 약 2개월 남짓이며, 이시기에 집중적으로 약 40만명의 관광객이 몰린다고 한다.

     

     

     

     

     

    백두산의 자연

    백두산은 동식물의 천연 박물관이고 과학 연구의 요람지이다. 

    식물상의 높이에 따라 띠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해발 1,150 이하는 잣나무 활엽혼성림이고, 해발 1,150m - 1,700미터 사이는 침엽수, 해발 1,700미터로부터 2,000미터 까지는 "아고산사 스레림대" 이며, 해발 2천미터 수림한계선 이상은 툰드라 식물군이다.

    2000m  이상에서는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온대 식물로부터 한대 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라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73목 243과 823속 2,424종 식물이 자라고, 그 가운데서 잣나무를 비롯한 경계 식물이 800여 종이 있고, 산삼, 영지, 음양곽, 당귀를 비롯한 귀중한 약재 식물이 300여종이 된다.

    식물이 많음에 따라 그 곳에 서식하는 동물들도 많다.

    그 중에서 희귀한 동물로서 동북호랑이,꽃사슴,사향노루,말사슴,담비,수달 등이 있고 조류도 300여종이 되는데, 그 가운데는 희귀한 원앙새도 포함된다.

    인삼, 녹용, 담비 가죽은 동북삼보라 하여 이곳의 귀중한 보물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원시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어 국내외 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백두산은 또한 유네스코에서 1980년 1월 백두산 자연보호구를 국제 생물권 보류지로 결정하여 생태계 보존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지역이다.

    동물들의 먹이 때문에 백두산 내 에서 잣의 채취는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백두산은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경계에 위치한 휴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도 부른다.

    장백산은 중국쪽에 있는 산이고 백두산[장군봉]은 북한 쪽에 있다.

    높이는 2,750m(북조선 측 측량)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고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 한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민족의 영산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자리 잡은 휴화산으로 산 전체의 총 면적은 8,000 평방km이며.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으로 북한에서는 2,749.2m로 약 5m의 차이가 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 웅석봉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성스런 산이었으며 또 단군의 설화가 깃든 산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산이지만 가까이 두고도 쉽게 찾아 갈 수 없는 산이어 통일의 그날이 오기 기다려진다.

     

     

    백두산은 옛부터 조선의 영산이며 만주족의 발상지로 인정되었고 많은 전설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백두산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 왔고,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중국 산해경에 "넓고 거친 들판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부른다 "고 적혀 있다.

    그 뒤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등으로 불리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10년(981년)부터 백두산이라고 불려 왔다.

    백두산은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해발 2,500m이상인 봉우리 만도 16개이며, 시대에 따라 이들 봉우리의 명칭이 달랐다.

    정상에는 천지(天池)라는 칼데라호가 있다.

    사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에  백두산의 폭발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발해가 멸망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다.

     

     

     

     

    북파에서 올라 만나는 절벽봉, 천문봉에서 바라보는 백두산과 천지 ...  한마디로 우와 소리밖에 안 나온다.

    말로만 듣던 천지, TV에서만 보던 천지 하고는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우리가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보았을 때처럼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그 착각... 뭐라고 그 흔한 감탄사도, 감정조차도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백두산을 오르기 전에 가이드가 전문 사진사를 이용하여 사진을 찍으라고 하기에 그 말도 그럴 듯하여 일인당 만원을 주고 6장을 찍었는데 사진 찍는 솜씨가 나만도 못하다.

    그저 빨리 끝내고 다른 팀 또 만나서 사진 찍으려고 대충대충 찍어 제치니 사진사가 찍은 사진 중에 마땅한 한 장이 없다.


    백두산은 화장실 시설이 아직까지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무척 불편하다.

     

     

    천지

     

     

    천지는 해발2,200m 높이에 위치한 화산의 분화구로 백두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의미에서 '천지'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 하며 천지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하였다 하여 천지라 하기도 한단다.

    가이드 중얼거리는 말로는 “온 천지의 사람들이 천지를 보러 왔다가 천지를 못 본 사람이 온 천지네” 한다.

    그만큼 백두산의 천지를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일 년에 40일 정도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래쪽이 햇빛이 쨍쨍 나도 올라가면 안개와 구름 때문에 한치 앞도 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기후변화가 워낙 심해서 거센 바람과 폭풍 발생이 빈번하기 때문에 모든 산객들이 이곳의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하늘이 점지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한다.

    천지의 높이는 2200m 이어서인지 주변에 있는 산들의 높이가 별로 높아보이지는 않다.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전체 면적은 10㎢, 호수주위의 길이가 13㎞ 정도이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놓여있다.

    천지의 가장 깊은 곳은 373m나 되고 평균수심은 200m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가장 깊다.

    연평균기온은 -7.3도, 평균수온은 0.7 - 11도 이며, 11월에 얼어붙었다가 6월이 되어서야 녹는데, 겨울철 천지의 얼음 두께는  1.5m ~ 3m에 이른다.

    또한 천지의 수질은 그냥 마실 수 있을 만큼 아주 깨끗하며 지하수와 강수량으로 채워진다. 

    지금도 밑에서 부터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으며 62 % 가 지하수라 한다.

     그중 신기한 것은 천지로 흘러 들어가는 물은 없고 서남으로는 압록강, 동남으로는 두만강의 근원이 되며 북쪽으로는 송화강의 근원이 되어 동북아 일대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해발 2,000m 이상의 산정호수의 밑에서 끊임없이 물줄기가 솟아 오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화산 활동으로 생긴 남한의 한라산 백록담과 비교를 하면, 백록담은 오로지 빗물에 의존한다.

    백두산은 지질 시대에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1413년,1597년,1660년,1702년,1900년등 5차의 화산 폭발이 있어 지금도 화산 활동 후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천지의 3/5은 북한, 나머지 2/5는 중국의 소유이며 주변의 봉우리도 그 경계를 따라 나뉘어져 있다.

    아쉬운 부분은 천지의 거대한 부분 중 관광객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평지는 중국소유가 많은 관계로 훗날 통일이 되어 천지 관광 사업에 막대한 이익이 중국으로 갈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장백폭포 또한 중국의 영토로 되어있다.

    모래 바람과 씨름을 하며 천지를 구경하고 천지와 장백폭포 갈림길 주차장으로 짚차를 타고 내려온다.

    내려 올 때는 오를 때처럼 짚차를 타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운전도 편하게 하여 느긋한 마음으로 내려온다. 백두산에서 내려다 본 주위는 커다란 평야처럼 보인다. 

     

     

    소천지

    장백폭포를 향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가면 소천지를 만날 수 있다.

    조금 큰 연못 크기이며 깊이도 별로 깊어 보이지는 않으며 주위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5분 정도면 족하리라. 아늑한 느낌이 들어 잠시 앉아서 쉬고 싶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크게 볼만한 것은 없다.

    소천지 오를 때 길옆으로 난 계곡이 깊고 험하며 잠깐씩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조그만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작은 계곡과 그 사이를 흐르는 힘찬 물살을 볼 수 있다.

    오르는 중간에 화장실이 있지만 귀신 나올까 겁난다.

     

     

    장백폭포

    소천지를 내려 와 버스를 타고 장백폭포로 향하는데 5분 정도면 장백폭포 주차장에 갈 수 있다.

    이 장백폭포 주차장에서 빠르게 걸으면 25분 정도면 장백폭포 아래에 갈 수 있다.

    시간 관계로 가이드들이 주차장에서 멀리 보이는 장백폭포를 구경하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하던 장백 폭포 아래까지 갔다가 오라고 권하고 싶다.

    아내하고 나하고 평상시 단련된 걸음으로 잽싸게 오른다.

    가이드는 폭포에 갔다가 오면 주차장아래 있는 온천에서 목욕할 시간 없어진다고 보채는데 우리야 목욕보다는 산을 오르는 즐거움이 더 크니까 무시해 버린다.

    장백폭포까지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너덜지대를 걸어야 하는 수고는 안 해도 된다.

     

     

    백두산은 16개의 산봉우리가 천지 기슭을 따라 병풍처럼 천지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북쪽은 트여 있어 그쪽으로 물이 흐른다.

    물은 1,250m 까지 물이 흘러 내려서는 낭떠러지에서 낙차 68m의 웅장한 폭포를 이루고 있다.

    천지의 수면에서 물이 떨어지는 유일한 폭포이며 송화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폭포의 옆에는 천지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낙석이 많아 주의 하여야 하며, 이곳으로 산행을 시작할 경우 백두산 정상을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아주 힘들며, 거꾸로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지난 폭우로 길이 유실되어 지금은 입산을 통제하고 있다.

    장백폭포에서 오를 경우 입구에서 모든 관광객에게 안전모를 쓰도록 권하고 있다.

    예전에는 트럭만한 낙석이 산행 길로 떨어진 적도 있으며, 최근 들어 이를 방지하기 위해 등산로를 동굴처럼 굵은 철사로 터널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백두산에는 장백폭포 이외에도 동천 폭포, 백하폭포, 제자하 폭포등 60여개의 폭포가 있으며 가장 큰 폭포가 장백폭포이다.

    겨울이 되면 중국 북방에 있는 폭포들은 모두 얼어버려서 그 웅장한 모습을 구경할 수 없으나 장백폭포만은 일 년 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악화 폭포는 그 높이가 50m이고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고 한다.

     

    장백폭포의 폭포 소리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다.

    크게 두 갈래의 물줄기로 나뉘어져 떨어진 물은 송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데 폭포의 모습이 용이 날아가는 것과 같이 생긴데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입구를 막아 놓아 폭포 바로 아래까지는 갈 수 없지만 그래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이서 본 장백폭포는 한마디로 ‘환상이었다“

    장백폭포를 내려 와 주차장 입구에 내려오니 호텔 뒤쪽에서 한 무더기의 산군들이 올라온다.

    두 서파능선 트레킹한 사람들인 모양이다.

     

    온천

     백두산내 온천은 해발 1,756미터 이상 되는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30여 곳이다.

    그 가운데서 천지 내에 두개의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개의 분수구가 있다.

    최고 수온은 82도에 달하여 이 온천물에서는 달걀도 삶아진다.

    그러나 일본의 온천에서 삶은 달걀의 판매는 양이 엄청난 것 같은데, 장백폭포 아래에서는 달걀 삶아 판매하는 곳이 없고  주차장에서 달걀을 삶아 판매하는데 꺼내 주는 것 사 먹어보니 덜 익은 반숙을 준다.

    온천의 물이 덜 뜨겁던지. 아니면 달걀을 금방 넣은 것이던지 하나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온천물에 담갔다가 건네주는 달걀이 껍질이 새까맣게 타 있는데 이곳에서 주는 달걀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달걀을 건네준다. 똑같은 유황온천인데도...

    주차장 아래 있는 온천에 들어가니 탕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기겁을 하고 나온다.

    바깥을 빼꼼 내다보니 노천탕이 있어 들어 가 앉았더니 담을 나무로 듬성듬성 엮어 놓아 바깥에서 전부 보인다. 조선족이야 훌러덩 벗고 목욕을 잘 다니니까 괜찮지만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안 맞을 것 같다.

    안팎에 있는 탕이 전부 지저분하여 샤워만 하고 바깥으로 나오고 만다.

    나중에 사람들 떠드는 이야기로는 지저분한 것은 온천물이 들어 올 때 같이 흘러들어 온 것이니 전혀 상관없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래도 꺼림칙하다.

     

     

    백하역

    온천까지 마치고 상쾌한 몸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고 이도백하의 산강호텔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자면 아직 시간이 있어 거리 산책을 나선다.

     

     

    호텔 앞 미인송이 잔뜩 심어져 있는 숲에서 놀다가 혹시나 하여 지저분한 길을 따라 갔더니 백하역이 나온다. 역 앞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차가 지나면서 먼지가 날리는데도 난전을 만들어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에 있는 물건들이 식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영지, 상황, 장뇌삼, 추자. 구기자 뭐 이런 한약재를 늘어놓고 파는데 그런 것을 누가 사 가는지 궁금하다.

    역 안으로 들어갔더니 전형적인 우리네 60년대 역의 모습과 똑같다.

    시내이지만 주변에는 닭, 오리, 염소가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다 큰 아가씨들이 길거리에서 대낮에 노상방뇨를 한다.

    지나다니는 차들도 많은데 저 많은 짐승들이 교통사고 안 내고 살아 있다는 것이 용하다.

    역 앞의 약국에는 진열되어 있는 약도 별로 없고 주변에는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지 이 부근에는 조선족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3일째[서파 오르는 길]

    오늘은 기차를 2 시간 정도 타고 송강하까지 가서 그곳에서 서파로 오르기로 하였는데 다행이 이도백하에서 서파로 가는 길이 개통이 되는 덕분에 바로 서파 산문까지 간다.

    지난달까지는 이 길을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서파 산문까지 가는 길은 아직은 공사 중인 곳이 많고 조그만 숲속 길 을 차들이 번갈아 피해가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버스 앞으로 보이는 숲길은 가히 환상적이다.

    한 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서파 산문에 도달한다.

    한 시간 30분 동안 엄청난 숲속 길을 달려간다.

     

     

    산문 입구는 지금 공사 중이라 어지럽고 공사 중인 사이를 피해 산문을 통과한다.

    이 산문에 있는 화장실이 백두산에 있는 화장실 중에 가장 깨끗하다.

     

     

    이 산문을 지나 나무 바닥을 300m 정도 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버스를 타고 약 1 시간 정도 오르면 서파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서파 주차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북적거린다.

    가만히 살펴보면 등산배낭을 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고 비닐 팩에 먹을 것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다.

     

     

    서파 주차장에서 천지를 오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지어 오르고 있다. 

    이곳에서 5호 경계비까지 1236개의 계단을 오르면 천지를 볼 수 있다.

     

     

    5호 경계비 있는 곳에는 중국인들이 그 경계석을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고 무척 혼잡스럽다.

    그 옆에, 그 뒤에는 북한군이 지키고 국경을 넘어 올적마다 제지를 하고 있다.

    중국 공안 중 한명이 누구의 부탁을 받았는지 북한군한테 가서 뭐라고 이야기 하면서 윗 주머니에 슬쩍 손이 왔다 갔다 하더니 누군가 사진기를 들고 북한 쪽 100m 정도 가서 사진을 찍는다.

    북한군은 중국공안에 설설매는 모습이다.

     

     

    북파도 복잡하지만 서파도 무척 혼잡스럽다.

    지난 겨울 지금은 고인이 된 고미영씨가 겨울에 이곳을 이동할 때 스노우 모빌을 이용하여 주차장까지 오르는 것을 TV로 본 적이 있다.

    백두산 등산은 일반인들의 워킹 등산은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자체 버스나 짚차를 강제로 이용해야 한다.

    하산도 마찬가지로 버스나 짚차를 이용해야 한다.

    중국 쪽 능선을 종주 하는 것을 서파 종주라 하며 5호 경계비가 있는 재운봉에서 시작하여 장백폭포까지 15km 에 이르는 구간을 말한다.

    여름에는 1일 종주가 가능하지만 겨울에는 1박 2일의 시간을 요한다.

    이 코스 중 청석봉 오르는 길이 가장 험하며 종주하는 내내 천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통제구역이며 입산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구간 트레킹은 요금이 조금 더 비싸다.

    입산통제 표지판 뒤로 대전에서 온 20명이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잽싸게 사라진다.

    이곳을 트래킹하는 사람들은 주로 한국인들이고 중국인들은 없는 것 같다.

     

     

     

    백두산 경계비

    1792년 숙종 38년 천아라의 제안으로 조선과 청나라는 경계비를 세운다.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4km 지점, 해발 2150m 에 세웠다.

    백두산은 현재 천지를 경계로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백두산 북쪽의 토문강을 국경으로 하였었는데 6,25 전쟁 이후 북한과 중국의 국경 확정시 백두산 천지를 반으로 분할하였다.

    1962년 평양에서 체결한 북중국경조약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백두산의 서북부는 중국으로 동남부는 북한에 속하며 천지의 54,5%는 북한에, 45,5%는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경계비는 8개가 있으며 5호 경계비를 기준으로 하여 맞은편에 6호 경계비가 있으며 직선으로 그어 중국과 북한의 경계 표시를 하고 있다.

    5호 경계비는 재운봉에 있다.

     

     

    금강대협곡

    서파 주차장으로 원위치 한 후 내려 가다가 금강대협곡 7km, 천지 25km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금강대협곡으로 향한다.

     

    대협곡은 백두산이 화산 폭발을 일으킬 때 용암이 흐르던 자리가 오랜 세월 풍화에 씻겨 이루어진 것으로 협곡 주위로는 원시림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협곡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흘러간다.

    협곡의 크기는 폭이 평균 120미터이며 깊이는 평균 80미터이고 길이는 10킬로나 되어 동양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운다.

    엄청난 깊이와 크기에 놀라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기에는 경사가 너무 급하고 아래를 내려 보는 자체도 어지럽다.

     

     

     

     

    물이 급하게 흐르는데 그 아래에는 만강(漫江)이라는 하천과 마을이 있어서 대조를 이룬다.

    협곡 주위 원시림에는 두 그루 나무가 한 뿌리를 두고 자라는 연리목과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고사목의 뿌리에서 새로운 세 그루의 나무가 함께 자라는 기현상도 볼 수 있다.

    협곡까지 가는 도로에는 곳곳에 작은 협곡들이 있는데 길가에 제자하(梯子河)라는 좁은 협곡이 있다.

    연리목 나무 주위에 쇠줄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사랑의 열쇠를 매달아 놓았는데 그것도 엄청난 양이다.

    나는 연리목의 사랑보다는 연리지의 사랑을 더 좋아 하는데 이 곳 젊은이들이 그 뜻을 아직 모르고 나무 두 개가 서로 엉켜 있으니 그것이 보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협곡을 지나 더 오르면 금강폭포(錦江瀑布)로 가는 길이 있다.

    이 폭포는 서쪽 면에서 가장 큰 폭포인데 30미터와 40미터, 2단으로 떨어져서 길이로는 장백폭포를 능가하는 폭포라 한다.

    폭포로 가는 길은 나무다리가 무너져서 도보로 이동하기에 시간이 다소 걸린다고 한다.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대협곡이어서 일부 100m 정도 밖에 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4일째 [이도백하 - 용정- 도문- 연길]

     

     

    어릴 때 보았던 우리가 여기에 있네

    이도백하를 출발하여 용정으로 향한다,

    용정을 거의 다 와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푸른솔은....” 에 나오는 일송정을 차를 세워 놓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본다.

    천년이 되었다는 일송정은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풍수지리상 저 나무 때문에 일본이 망한다고 베어 버리고 그 자리에 혈을 박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정자가 세워지고 근래에 소나무를 다시 심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 소나무가 언제나 클런지..

     

     

     

     

     

    산 옆으로 해란강이 보이지만 물이 많이 흐르는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용정 시내를 지나는 해란강에 흐르는 물이 더 많다.

    용정 들어가 전에 참외 밭에서 참외와 수박을 사 먹는데 참외밭 앞에 좌판을 벌려 놓고 파는 아낙네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파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참외는 우리의 60년대 참외처럼 때깔도 나지 않고 그 맛도 그 시대와 비슷하다.

    주변을 보면 중국에 와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내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에 와 있는 것 같다.

    개울가에는 소가 매어져 있고, 소달구지가 다니고 정말 신기하다.

    이제 우리 어린애들한테 옛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보게 하려면 이곳으로 보내야 할 것 같다. 

     

     

     

     

    용정대성중학교

     

     

     

    용정시내에 들어가서 용정대성중학교를 가서 잠시 2층에 있는 박물관을 구경한다.

    박물관 설명은 이 학교 교사들이 직접하며 관람이 끝난 후 서명을 하고 협찬금을 받는데 강제적인 것은 아니고 자발적으로 내면된다.

    나오면 책을 파는 곳이 있는데 책의 편집이나 내용 등 이 모든 것이 많이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층을 내려오면 기념품 가게가 있으며 건물을 나오면 돌로 된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화장실이다.

    1박 2일에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이며 이 학교는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협조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학교박물관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용정 시내는 조선족이 더 많이 사는지 한글 간판이 많이 보인다.

    윤동주 생가에 갔는데 어설프지만 깔끔하며 그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앞에는 요즈음과는 다른 건물의 교회가 있는데 안을 보면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겉 모습은 일반 시골집이다. 

    그 앞에는 우물이 있지만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는 듯하며 물은 깊고 그 위에는 기름이 떠 있는 듯하다. 

                           

                                            자   화  상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서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1939. 9 ]

     

    윤동주가 이 우물을 보며 쓴 자화상이란 시입니다. 

    우물도 깨끗하게 지금 현재도 들여다보고 먹을 수 없을런지......

     교회 앞에는 잘라진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위에 왜 작은 지붕을 만들어 놓았을까.

    집 뒤에 있는 씨름장은 누가 사용할까.

    1 박 2일 팀들이 와서 씨름을 하여 넓은 줄 알았더니 작은 씨름장이고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는 미루나무와 수양버들은 그 역사를 알까.

     

     

    도문 

    용정을 나와 도문으로 가는 길은 시골의 조그만 농로를 따라 간다.

    용정에서 1 시간 이상을 달려 북한이 보이는 두만강 부근의 회령 건너편에 도달한다.

    북한 땅은 민둥산이고 강 건너가 북한이지만 우리가 마음대로 건널 수 있는 땅은 아니다.

    왜 중국 땅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데 같은 땅이면서도 북한은 갈 수 없을까.

    물이 깊지 않아서 걸어서도 넘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얕아 보인다.

    북한 사람들이 강가에 발정기 암소를 매어 놓으면 중국의 숫소들이 암소를 찾아 강을 넘어가면 북한 사람들이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런 정도니 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북한의 집들도 크고 깨끗해 보이는데 가이드 이야기로는 겉보기만 그렇지 가보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터덜거리는 길을 북한 땅을 옆에 두고 달린다.

    아주 오래전 우리네 시골길을 덜커덩거리며 가는 것과 너무 흡사하다.

    80m 마다 북한 땅에는 초소가 있다 한다.

    미국 여기자 2명이 넘어 갔다는 늪지에 서 보니 여기서 북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넘어가서 어쩌자는 것일까.

    북한 땅을 밟고 30초 만에 잡혔다 한다.

    기자들을 구하러 나선 미국의 전직 대통령까지 나선 것을 보면 미국이란 나라도 대단하지만 북한쪽으로 민가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취재하겠다고 북한으로 넘어간 여기자도 대단한지 아니면 정신이 나간건지....

     

     

     

     

     

    도문에 도착한다.

    도문은 우리나라의 북쪽 가장 끝자락에 있는 땅이다.

    도문은 중국의 도시 이름이고 우리의 끝자락 이름은 온성이다.

    철도 경계에는 중국의 경비병이 지키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도로가 있는데 그 다리 위에도 중국의 경비병이 서 있다.

    철도, 도로 모두다 중국 쪽 경계는 화려하기만하다.

    도로 다리의 1/3 정도까지가 중국 땅이며 그 곳까지 가보려 했는데 경비병이 제지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 있는데 왜 못 가게 하나 했더니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나.

    할 수 없이 다리 옆에서 건너편에 있는 북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중국의 땅 도문은 지금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 같다.

     

     

    도문 시내 두만강에는 선착장이 있으며 조선족은 모터가 달린 배를 타고 약 200m 정도를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데 중국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배로 50m 정도만 오르내린다.

    뱃사공이 “우리는 구명조끼가 이렇게 좋은데 중국 놈들은 구명조끼도 다 낡아빠진 것 쓴다” 고 자랑한다.

    바로 옆에 북한군이 왔다 갔다 한다.

    “저 놈들이 배가고프면 먹을 것 달라고 하고, 담배 달라고도 해. 참 불쌍한 애들이야” 라고 이야기 한다.

    17살 정도밖에 안된 애들이 7년 동안 복무한단다.

    북한으로 갔다 왔느냐 물으니 수없이 왔다 갔다 한단다.

    그러면서 북한에 가서 살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단다.

    그곳에 왜 가느냐고 역정을 내신다. 국

    경 경계는 강 건너 중국 쪽에 있지만 강물은 서로 공유한다고 한다.

    단 땅을 밟으면 안 된다고 한다.

    조선족들이야 관계없지만 남쪽 사람들이나 외국인이 땅에 발을 내려놓으면 무조건 잡아간다고 한다.

     

     

     

    사공의 이야기로는 예전에 콩을 배에 잔뜩 싣고 중국과 조선이 거래를 하였기 때문에 두만강이라 하였다는데, 중국 쪽에서 세운 경계비에는 도문강이라 새겨져 있다.

     

     

    유람선으로 구경을 마치고 연길에서 흘러나오는 강과 합쳐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어 동해로 나가는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연길로 돌아온다.

     

     

     한국 노래와 춤은 우리보다 더 잘 알아

    연길에 와서 비행기 타는 시간이 남아 진달래 광장에 잠시 들렸는데 조선족들이 공원에 야외 노래방을 차려 놓고 노래를 부르고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춤을 추고 있다.

    중국 노래가 아닌 한국 노래를. 그것도 최신곡들을 .. 한국에 사는 나도 들어 보기는 했어도 가사는 모르는 노래를 모두들 어찌 그렇게 잘할까. 노래방 기기는 누가 설치했는지 노래 한곡 부르는데 3원을 달란다.

    노래를 신청하고 밀린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노래를 할 수 없단다.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햇갈린다. 

    야외의 노래방만 아니라면 여기는 한국이다.  

    밤 9 시 30분이 되자 공원에는 불이 꺼지고 모두 자진 해산한다.

    그런데 아무리 공원이지만 밤늦게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면 주위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이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 발 맛사지 받으러 간 사이에 백화점을 들렀다.

    전 세계 유명한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중국 자체 브랜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같이 간 아주머니가 가격을 깍는데 기가 질릴 정도다.

    여자용 가방 하나를 사는데 1180원 적혀 있는 것을 250원에 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어찌 백화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도백하에서 있었던 일이다.

    호텔 옆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어서 캔맥주 하나하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 하였는데 12원을 주었다.

    우리나라와는 별 차이가 없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것을 보니까 그 반값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소리 않고 계산을 했으면 될텐데 한국말로 떠드니까 아예 계산기를 들고 금액을 찍어서 보여 주는 바람에 바가지 쓴 것이다.

    한마디로 떼놈들이다.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그런 여행이었다.

    연길, 이곳은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우리가 살던 그 모습과 너무 똑같았다.

    중국이라기보다는 한국 땅이었다. 

    역사를 배울 때 만주 벌판은 조선 땅이고, 고구려의 역사라고 배우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녁 식사를 하고 밤늦은 비행기를 타고 청주공항에 내리니 새벽 4시 ...  집에 오니 아침 6시 밤새도록 1 분도 자지 못하고 또 다른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니 몸살이 나서 저녁때는 끙끙거리고 밤새도록 누워 앓아야만 했다.

    이제 잠 안자고 여행하는 것도 무리가 되는 그런 나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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