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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안-계림]이 세상 구석구석/중국 시안- 계림 2007. 12. 6. 18:52
2007, 08,11 ~ 08 15
날씨는 5일 동안 계속 맑음.
1일 째
아침 일찍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인천공항으로 갔건만 비행기는 1 시간 지연된단다.
12시 45분 출발 비행기가 13시 30분으로 지연되더니 또 다시 30분이 지연된다.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어선다. 그
런데 관제탑의 이륙허가를 받지 못해 비행기 안에서 1시간 30분을 고스란히 기다린다.
좁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도 없다. 출발하는 시간은 오후 3시 30분이 넘어선다.
3시간 가까이 지연된 셈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보니 어떤 비행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륙 준비하는 비행기가 줄을 서서 기다릴 줄 알았더니 비행기 한 대 보이지 않으니 허탈감이 앞선다.
왜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관제탑 직원한테 동방항공에서 잘못 보인 모양이다.
약 3시간 정도 비행하여 서안공항에 도착한다.
이번에는 내가 단독으로 4사람[두 쌍]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라 부담이 되는데 서안 공항을 빠져 나가면서 의외로 수속이 간단하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와 저녁 식사하는 자리로 이동한다.
이동 중에 길가에 복숭아를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어른 주먹보다 더 큰 것을 7개를 2000원에 사서 차에 실었건만 우리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도 먹지 않아 전부 내버리고 말았다.
사실 그것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삼겹살을 먹는 한식인데 의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중국 본토 사람들이다.
우리의 말투와 행색이 이상한지 자꾸만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 나라는 고기가 비싼 탓인지 아니면 우리가 먹는 삼겹살이 흔하지 않은 탓인지 삼겹살 6인분을 가지고 왔는데도 1인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혼자 다 먹어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양이 적다.
중국의 음식 문화는 먹고 난 후 음식이 남아야 대접을 잘 했구나 한다는데 이번 경우는 아닌 모양이다.
양귀비쇼
저녁 식사 후 양귀비 쇼를 보러 갔는데 정말 재미없다.
입장료는 20,000원[1인당]인데 극장 안에서 맥주도 팔고 음료수와 안주가 있어 마시면서 구경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설명하는 자막은 중국어와 영어로만 나온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배우들도 거의 중국 전통 춤과 무예 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다.
관객의 대부분도 서양 사람들이고 한국 사람은 이곳을 별로 오지 않는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북경 서커스, 상하이쇼, 항주의 송성 쇼에 비해서 너무 재미가 없다.
계림에 가서 본 몽환이강 쇼가 훨씬 더 재미있다.
서안에서 3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 이곳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곳은 아닌 모양이다.
서안 도시 개요
서안은 중국 섬서성의 성도이며 중국의 역사 유물이 많이 존재하는 도시이다.
陝자를 우리가 읽으면 협자로 읽었더니 섬 자로 읽으란다.
서안의 인구는 약 8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중국 지도를 보면 거의 중간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의 2000년 정도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예전에 동양에서 서양으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안은 역사가 깊은 도시이니 만큼 시내 곳곳에 볼거리가 많다.
시내에 빙 둘러 있는 성벽은 보존이 너무 잘 되어 있으며 섬서성 성도 앞에 있는 한 무제 때 흙으로 만들었다는 성이 2000년이 지나서 아직도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흙으로 만든 성인데도 이토록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성을 축조할 때 일화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성을 쌓고 활을 쏘아 만약 활이 성벽에 박히면 그 성을 쌓은 사람은 목을 내 놓아야 했단다.
쌓은 성에 활을 쏘아서 활이 튕겨져 나와야 무사했단다.
또 서안 시내는 비림, 종루, 성벽 등이 있으며 시외로는 진시황릉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있다.
우리가 예전에 시골에서 장에 갈 적에는 장안에 간다고 하였는데 이 서안의 옛 이름이 “장안”으로 불리었으니 중국의 많은 것이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날씨는 햇볕 속에 있으면 무척 뜨거운 날씨이지만 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 때문에 더운 줄 모른다.
가이드의 말로는 서안 시내에만 대학이 20여개 있다고 한다.
화청지로 가는 도중에도 커다란 대학이 몇 개 길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변에는 수많은 공장과 연구소가 있어 중국 내륙의 공업도시라고 한다.
숙소 : 다이아몬드호텔. tel 029- 8576 - 8888
2일째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는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서안 역
모든 것이 역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인지 역 광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넘쳐나고 있다.
많은 짐을 하나씩 짊어지고, 밀고 하면서 아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지금이 아침 6시인데도 저 많은 인파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기만하다.
그러나 머지않은 장래에 각자 자가용이 한 대씩 생기면 기차로 이동하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식당에 내려와 아침 식사는 호텔 뷔페식인데 서양식으로 차려 놓아서 먹을 만 했다.
어떤 곳은 뷔페식이라 해도 중국식으로 차려 놓아서 먹을 것이 별로 없었는데 다행히 식사는 맛이 있고 좋았다.
서안성벽
1368년 원을 무너뜨린 명 왕조는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에 새로운 성을 쌓았다고 한다.
1462년 베이징으로 천도하기까지 50년 동안 중국의 중심지였다.
성의 길이는 약 12 km이며 높이가 12m , 넓이가 12 ~ 14m 라고 한다.
그래서 성의 높이도 높거니와 성에 오르면 그 넓이에 감탄한다.
아마 만리장성 넓이의 두 배는 되는 것 같고 만약 차를 운행해도 된다면 그 위에 2차선 차도를 설치해도 좋을 정도로 넓다.
성 위에는 자전거를 빌려 주는 장소가 있어 시간이 있으면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보면서 성도 감상하고 서안 시내도 구경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할 것만 같다.
그런데 어떻게 설계를 하였는지 주변에 차가 많이 지나다니건만 차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장기간의 시간이 흘렀건만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놀랍기만 하고 우리의 남대문보다 몇 백배 크기인데도 관리는 민간인이 맡아서 한다니 놀랍기만 하다.
화청지
화청지는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대 황실의 유적지이다.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온천 물 때문에 중국황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수나라 때부터 3000년간 온천 휴양지로 황실이 이용하던 장소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하였던 장소로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서주시대에 이곳에 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이곳에 石宇, 당나라 현종 때에는 이곳을 더 넓혀 화청궁이라 불리다가 이곳이 온천지에 지어 졌으므로 “화청지‘ 라 불리었다고 한다.
756년 안록산의 난으로 화청지는 불에 타서 훼손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 된 것은 청나라 말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규모의 문화재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부터라 한다.
이곳은 또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하다.
화청지 입구에 서안사변 표지석이 있다.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공산당 토벌을 면하러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 곳 여산 중턱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 안에는 장개석 집무실과, 주은래 집무실이 있다.
결국 이 화청지는 고대의 역사로부터 현대의 역사까지 많은 내력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청지는 서안에서 약 25km 정도 떨어진 여산 산록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서안 시내에서 화청지로 가는 고속도로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어 추후에 여행을 오는 사람들에게는 교통체증은 없을 것 같다.
*.온천탕
화청지 안에 가면 수증기가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곳에 갈 수 있는데 여기서 시작된 온천 물은 연화탕을 지나 해상탕을 거쳐 부용호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 관람 순서도 이런 방향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 따라 가느라고 거꾸로 하였다.
해상탕은 양귀비가 목욕하던 장소이며 목욕탕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상탕은 지금도 섭씨 43도 물이 흐른다
연화탕은 현종과 양귀비가 합탕을 하는 장소이며 해상탕보다는 무척 크다.
또 바닥에는 옥이 깔려 있어 처음 들어오는 물이 서서히 식어 탕 물의 온도를 조절 하였다고 한다.
또 주변에는 양귀비와 현종이 만남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시하여 놓았다.
부용호는 강우량이 적어 8마리의 용을 내려 보내 관리토록 하였으나 이 8마리의 용은 놀기만 하자 1마리를 더 내려 보내 이 8마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한다.
그래서 부용호의 아래쪽에는 용의 모양을 한 8마리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위에는 한 마리의 용이 물을 내보내고 있다.
또 전라의 양귀비 조각상이 있어 음큼한 남성들이 올라가 젖꼭지를 만지면서 장난을 치고 있다.
양귀비 조각상 뒤에는 연꽃 모양을 한 수도에서 온천수가 흐르는데 이곳에서 손을 씻고 자연 바람에 손을 말리면 손이 무척 부드러워진다고 하는데 워낙 바삐 움직이다 보니 나중에 손이 부드러워졌는지 확인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손을 씻는데 중국 돈 10위안씩 받고 있다.
또 양귀비가 목욕을 한 후 머리를 말렸다는 누각이 바람이 잘 부는 곳에 있다.
양귀비와 현종
양귀비는 그 당시 뚱뚱하고 못 생긴 얼굴이었고 또 암내가 아주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현종이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현종이 비염이 있어서 냄새를 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시황릉
버스가 진시황릉 가까이 갔을 때는 길이 단선이라 무척 밀린다.
이 지역은 차가 밀려도, 새치기를 해도 경찰은 간섭하지 않는다.
그냥 경찰은 구경만 하고 있다.
심지어 경찰차를 길 가운데 차선 중간에 떡 걸쳐 놓고 스스로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면서 자신들은 딴 짓을 하고 있다.
덕분에 버스 안에서 멀리 있는 진시황릉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은 능이 아니라 높지 않은 구릉과 같은 산이다.
저 정도로 큰 산을 2000년 전에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필요했을까 생각하니 끔찍한 생각이 든다.
진시황릉 가는 길가의 과수원에는 전부 다 석류 밭이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돈을 얼마씩 내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방법도 있는 모양이다.
사람 보아 가면서 더 받고 덜 받고도 주인 마음대로인 모양이다.
아마 외국인에게는 더 받는 모양이다.
진시왕릉 입구에 도착하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물건 사라고 매달리는 장사꾼들 때문에 걷지도 못할 지경이다.
하는 수 없이 먹으면 없어질 고구마를 사서 먹어보니 우리의 고구마하고는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리의 고구마는 껍질이 얇아서 안의 내용물이 먹을 것이 많은데 비해 이 서안의 고구마는 껍질이 두터워서 껍질을 까는데 거의 70%는 없어져 버린다.
관람하는 사람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일대일로 붙어서 아주 못살게 하는데 질릴 정도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 왕 ! 진시황제
자신이 황제로서는 처음이라 하여 시황제라고 명명하였다니 놀랍기도 하고... 그 위업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묘의 크기는 산보다 더 크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자신이 중국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능을 만들기 시작하여 36년 만에 완성이 되었는데 이 능이 완성 되었을 때는 시황제는 이미 죽은 후 였다고 한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하기만 한데 공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국 정부에서는 오래 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부근의 땅은 농사를 짓는데도 땅을 파지 못하게 하여서 주로 재배되는 것이 석류라 한다.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가장 크다.
능의 높이가 79m이며 정상부까지 오르도록 시멘트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475m, 남북 384m, 이며 능의 봉분 뒤쪽으로는 석류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이 묘를 만들기 위해서 7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그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숲도 있고 산도 있단다.
시황제는 아마 죽어서도 이 세상과 같은 모양으로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황실보석 창고, 그리고 거대한 돌로 만든 중국 지도가 있다고 한다.
능 속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입구를 들어서자 커다란 표지석이 나오고 그 위로 난 길을 가자 옛 모습을 재현하는 재를 올리고 있다.
아무리 얇은 옷을 입었다 해도 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햇빛 아래 공연을 하는 무희들이 불쌍해 보인다.
햇볕에 하도 그을린 탓인지 얼굴은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 같다.
연극이 하나 끝나는 데는 10분 정도 소요 되는 것 같은데 3번에 걸쳐 진행 되는 것을 본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한 가지 축문을 큰 소리로 읽고 모두 엎드리는 형태를 취하는 것을 보면 시황제 대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를 보고 난 후 계단을 따라 오른다.
5~ 10 분 정도 오르면 정상 부위에 오르는데 정상 부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음료와 아이스크림 파는 장사꾼이 있으며 진시황릉 설명서가 중국어와 영어로 기록 되어 있는 설명판이 있으며 쉴 수 있는 의자가 몇 개 있을 뿐이다.
정상에서 보면 서안 시내를 볼 수 있다.
병마용갱박물관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진시황병마용이며, 1974년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한다. 이 농부는 현재 박물관 안에서 자신이 쓴 책을 팔면서 자신의 책을 사 가는 사람들한테 사인을 해 주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마용은 서안에서 3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여산 북쪽으로 위수와 접해 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만든 병사와 말을 가르키는데 진시황의 사후에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74년 발굴된 이후 아직도 계속 발굴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며 그 가운데 1호 갱에서만 6000여 병마가 실물크기로 질서 정연하게 정렬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전투를 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들 병사용도 하나같이 표정이 다르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처음 병마용 입구에서 병마용 갱까지는 조그만 소로 길을 따라 15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그 사이에 정원을 조성한지 오래 되지 않은 듯 나무는 작고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입구에서 병마용 갱까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차가 있는데 운임을 받는다.
그래도 들어가는 곳은 거리가 멀어 탈만 하겠지만 관람이 끝나고 나오는 곳은 거리가 가깝고 그 이후 걷는 거리가 5배 정도는 되니까 아예 처음부터 구경하면서 걷는 것이 편하리라.
병마용 갱 입구에서 또 다시 표를 점검하기 때문에 처음 산 입장권은 그대로 소지하여야 한다.
병마용 갱 출입구는 비좁은 것은 물론 먼저 들어가려고 서로 아우성을 쳐 한마디로 무질서 그 자체이다.
더운 날씨에 더 덥다.
진시황 친위군단을 모신 곳이며 발굴된 순서에 따라 1호갱, 2호갱, 3호갱이라 한다.
1호 병마용 갱
병마용은 흙으로 만든 병사와 말을 의미하며 앞부분은 복원이 되었고 중간은 복원 중이고 뒷부분은 아직 미개봉 상태로 있다.
1호 갱이 가장 크다.
거대한 돔으로 덮인 갱으로 병마용 박물관 중에서 가장 크며 갱의 깊이는 5m 이고, 갱내에는 6000 여기의 사람 모습을 한 토병과 말이 있으며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정렬되어 있다.
또 특이한 것은 남쪽과 북쪽 가의 병사들은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남쪽 병사는 남쪽을 북쪽 병사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또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병사는 178 ~ 187 cm 크기의 토병들은 무사토용으로서 손에는 먼 곳을 저지할 수 있는 궁수병기를 손에 쥐고 있다.
그 뒤로 6000여 명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정열하고 있는데 손에는 창과 긴 병기를 들고 서 있다.
이곳에 있는 병마용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 긴 창, 등이 방병기 및 궁노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력부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호 병마용 갱
규모는 1호 갱보다 적으나 다양한 모습의 병마용이 있어 보병, 기병, 전차 등의 3개 병종을 혼합한 부대이다. 1호 갱이 주력부대라면 2호 갱은 기동력이 있는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 같다.
갱내에는 기마병, 보병, 궁병과 전차들이 혼합된 대형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크게 4등분하여 나눌 수 있는데 궁병들이 모여 있는 궁병용부대, 말과 전차가 있는 전차병부대, 보병과 기마병이 혼합되어 있는 부대, 기마병만 있는 부대 등 4 개 부대가 서로 독특한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병마용은 1300 여기이며 전차가 80여량이 있으며 다량의 금속병기가 출토 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신을 보면 신분이 높을수록 앞부분이 높다고 한다.
그리고 신발바닥을 보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흙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너무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다.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마른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데 장군들은 배가 나오고 체구가 좋으며 옷도 갑옷을 입고 있다.
3호 병마용 갱
3개의 갱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고 병마용의 수도 가장 적다,
규모는 가장 작지만 그 역할은 중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2개의 갱은 전투대열로 정렬되어 있지만 이곳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통로 양쪽에 정렬되어 있어 아마 지휘본부인 듯하다.
이곳에서는 사슴 뿔, 짐승 뼈가 출토 되었다 한다.
또 6개의 토기 병마용과 4마리의 말과 1대의 전차도 함께 출토 되었다.
진시황이 타는 마차는 누워서도 탈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고 밖에 나올 때는 신하들이 우산을 들고 나오는데 받침대가 있으며 세워 놓았을 때 그늘이 지는 방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머리를 끄덕이게 하고 진시황의 마차 바퀴의 살은 30개라 한 달을 뜻한다고 한다.
4호 병마용 갱
사장 됨. 3호 갱을 나와 보면 흰색으로 페인트를 칠 한 곳이 4호 갱이라 한다.
이곳에 갈 때는 공부를 많이 하고 가야한다.
가이드가 설명을 하지만 각 가이드 마다 데리고 온 관광객들을 상대로 마이크까지 잡고 떠드는 바람에 정신이 없다.
또 엄청나게 많은 관광객이 밀려다니기 때문에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일행과 떨어지기 쉽다.
또 중국의 가이드는 15명이 넘으면 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다니는데 그 깃발이 한두 개 면 모를까 엄청나게 많은 깃발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
종루[鐘樓]
서안 시 중심에 있다, 아주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 있다.
주변에는 서안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있고 건너편에는 만두집으로 유명한 덕발장이 있다.
종루는 외관 3층, 내부 2층으로 된 누각으로 1384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158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되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외기둥 양식으로 지은 진기한 건물이다.
종루 위로 올라가[유료]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데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종루보다도 그 뒤에 있는 백화점이 더 의리의리한 건물이다.
진시황릉 관람을 마치고 시내로 들어오는 중에 차가 기름을 넣기 위해서 주유소에 들렀는데 차가 멈추어 서 버린다. 차를 구입한 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데 차는 에어컨도 들어오지 않고 많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녁에 보니까 라이트가 나간다.
밖 뿐 만아니라 안에도 전부 나간다.
이 차를 그 다음 날 다 고치기는 고쳤더라마는 차가 서는 바람에 뒤에서 밀기까지 하였다.
덕발장
1936년에 개장하였으며 처음에는 북경식 물만두를 주로 만들었으나 현재의 덕발장 교자연은 200여 종의 다양화된 맛을 선보인다.
서안 시내 종루 건너편 덕발장, 덕이 길게 자란다. 덕이 머리처럼 자란다는 뜻이란다.
덕발장의 물만두는 만두와 국수를 같이 삶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서태후가 좋아 했다는 태후전골은 만두를 진주크기로 닭고기를 넣어서 만든다. 커다란 솥을 가지고 오더니 물을 팔팔 끓이고 한국말이 서툰 아가씨가 진주만두라고 한다.
다 익고 난 후 먹으면서 진주가 씹히나 하고 아무리 찾아도 진주를 찾을 수 없었는데 진주만두 내력을 듣고 나니 웃음이 난다.
각 층마다 일인당 가격이 틀리다.
우리가 식사를 한 곳은 2층이다.
1층은 130위안, 2층은 180위안, 3층은 230위안이란다.
1층이 가장 싸고 3층이 가장 비싸다.
그래서인지 아래층에는 중국인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2층에는 주로 외국인[서양인]들이 자리를 차지 있다.
이 덕발장은 우리의 만두.... 중국에서는 교자[지아오즈] 라고 한다.
이 식당에서는 한국 사람이 오면 어설프게라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아가씨가 심부름을 하고 식단도 김치가 따로 나온다.
중국에서는 만두[만토우]를 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밀가루 빵을 준다.
닭, 오리, 물고기 등 각종 산해진미와 온갖 최고급 재료로 삶고, 굽고, 찌고, 볶고 튀기는 등의 방법으로 만들고 맛도 단맛, 신맛, 쓴맛, 고소한 맛 등 맛이란 맛은 다 내고, 모양도 새, 꽃, 물고기, 동물 등 각종 모양을 내는데 크기가 한입에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작다.
이곳은 중국의 강택민 주석, 김대중 대통령,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이곳에서 식사를 하여 더 유명하다.
덕발장을 나오면 시내 중심가라서인지 몰라도 걸인들이 많다.
어린애들은 꽃 한 송이를 주머니에 몰래 넣어 놓고는 무조건 1000원을 내놓으라고 조른다.
이 짓거리를 얼마나 하고 다녔으면 7~ 8 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5개국 말을 한다고 하니 생존의 법칙치고는 교육적이다.
옥매장
옥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방법은 옥을 들고 밝은데 비추어 보아서 잡티가 있거나 무늬가 있으면 옥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유리이거나 인조라 한다.
3일째
비림박물관
비림박물관은 1087년 복송 철종 2 년에 개성석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현재 한 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비석과 1천여 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으며 비석들이 모여 숲을 이룬 것 같다고 하여 비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개성 석경은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 [655,025]자를 조각한 것으로 여기에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 등의 친필석각과 조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 등이 집중 되어 있다. .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 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 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섬서성 박물관도 있지만 그 박물관보다 더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서안에서 가장 기념이 될 만한 비석 탁본을 구매할 수 있으며 탁본 실에서 판매하는 것과 탁본 위에 작은 도장이 새겨져 있는 것만 진품이다.
탁본 실에서는 쉼 없이 탁본을 뜨고 있다.
한 장 구입하여 볼까 하였더니 한 장에 400위안이란다.
워낙 모조품이 많으니 구매 시 주의해야한다.
집에 와서 한 장 사올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
아방궁
우리는 아주 큰 집을 이야기할 때 아방궁만하다.
아방궁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대체 아방궁이 얼마나 크게 지었기에 세인들의 입에 그렇게 오르내릴까 궁금하던 차에 아방궁을 들려 본다기에 얼마나 가슴이 설레던지..
지금 현재의 아방궁의 모습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 크기는 별로 커 보이지 않으며 뒤쪽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호수 안에도 집이 한 채 있으며 그 뒤로 정복한 六國의 모습을 닮은 모습의 집들을 지어 놓았다.
그 경치는 현재 새로 지은 아방궁에 올라 구경할 수 있다. 그 곳까지 다녀오기에는 너무 멀다.
아방궁에서는 6명이 나와서 공연을 하는데 예전에는 뜰에서 하였으나 지금은 관람객이 적어 실내에서 하는데 진시황이 시녀에게 술 한잔 받아먹고 최신의 핸드폰을 들고 전화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약 10분 정도 공연한다.
아마 그 당시에 핸드폰이 있었다면 진시황이 전 세계를 통일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성(京城-북경), 함양(咸陽-서안)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히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12만 명을 재울 정도면 집 크기가 어느정도였을까 짐작은 된다만.... 그
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 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 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체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계림으로
국내선 이동이라 거치는 것이 없어 좋다.
또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는 것도 없고 제 시간에 출발한다.
단 한 가지 안 좋은 것은 비행기 안에 동양 사람보다는 서양 사람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비행기 안에 노린내가 진동을 한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눈만 마주치면 키스를 하고 뽀뽀를 한다.
우리가 볼 때는 참 희얀한 족속들이다.
비행기가 계림 공항에 도착한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가니 기후가 후덥지근 하다.
서안의 기후와는 거리상으로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차이가 많이 난다.
서안은 날씨가 더워도 그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더운 줄 모르고 끈적거림도 없이 시원한데 비해서 이 곳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린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도중에 주변 경치는 작은 야산인 바위산들이 많이 보인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아름다운 바위산들을 파괴하는 현장이 곳곳에 보인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지금 가고 있는 이 고속도로도 저토록 아름다운 산들을 파괴하며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런 산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몇 개 없어도 관계없다는 투다.
계림의 개요
계림은 광서성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열대 기후에 속하여 기온이 온화하고 연평균 기온은 19도 정도이다. 1년 중에 250일은 비가 온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한 기후이며 이곳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10월에서 4월까지이며 이 기간에는 쾌적하고 맑은 날이 많아 계림의 풍치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계림에는 산맥이 없다. 산은 시내건 시외건 아무 곳에나 불쑥불쑥 제멋대로 솟아 있다.
계림이라는 이름은 계수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음력 8월 15일 전후로 거리에 계수나무의 향기가 넘친다고 한다.
이곳의 농사는 이모작 또는 3모작이며 녹지면적은 74%이며 계림의 계수나무는 잔가지의 나무가 많다.
계수나무는 세계지, 계지, 계피, 육계 등으로 구분되는 약제를 만들어낸다.
나무 끝의 아주 가느다란 가지는 세계지, 조금 더 굵은 것은 계지, 계수나무의 껍질은 계피, 계피보다 육질이 더 굵은 것은 육계라 한다.
상비산
상비산 건너 편 조망대에서 멀리 위를 바라보면 바위에 구멍이 뚫린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을 천산이라 한단다.
천산은 높이가 225m 이고 5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데 한 마리의 수탉처럼 생겼다 한다.
그 곳에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크게 볼 것이 없다면서 이 가이드가 상비산에서 구경하고 일정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곳은 가지 않는단다. 상
비산 앞에는 코끼리 조각상이 다리에도, 강가에도 많이 보이는데 강가에 있는 것은 코끼리 다리에 배를 매달아 놓았는데 어찌 보면 코끼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묶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게 코끼리 다리에 쇠줄을 달아 배를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비산은 우리가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리 큰 산은 아니다.
상비산 이라고 산이 붙었다고 해서 커다란 산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지역의 산들이 대부분 작은 산들이지만........상비산은 도화강과 이강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 지점에 있다.
산의 형태가 마치 코끼리가 코를 강물에 박고 물을 먹는 형태라 해서 상비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코끼리 모양으로 생긴 아주 커다란 바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산 위에는 정자도 있고 탑도 있다.
상비산의 코끼리가 물을 먹는 배경으로 해서 우리가 사진을 찍는 뒤에서 누군가 카메라 들이대고 같이 사진을 찍는다.
뒤돌아서지도 않아서 현상이 된 사진을 들고 와서 사라고 한다.
우리에게 2,000원을 달라고 하는데 가이드가 뭐라고 하니까 1,000원만 내란다.
상비산 부근에 아리랑이라는 한식집이 있는데 가이드 이야기로는 음식 값이 비싸단다.
얼마나 비싸냐고 물으니 한국과 음식 값이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곳 상비산을 찾는 이유는 장수하는 코끼리를 신성스럽게 여기는 탓이라고 한다.
상비산은 중국돈 50위안에 그려져 있으며 이강 풍경은 20위안에 그려져 있다.
또 서호는 1 위안에 그려져 있으니 이제 이 세 곳을 전부 가 본 셈이 된다.
상비산에서 조금 내려오면 계림 시내에 있는 다리가 있는데 이 부근에는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애들도 많고 어른도 많다.
상당수는 다리에 풍선 비슷한 것을 달고 수영을 하는데 어디서 막 배운 수영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제대로 배운 수영 품이다.
또 이 다리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도 많은데 아래는 수영하는 사람도 많고 .... 낚시 줄에 사람이 걸리지는 않을지
금탑은탑야경
우리나라의 함백산 아래 5대 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에 가면 금탑, 은탑, 수마노탑의 전설이 있다.
그 정암사 뒤의 산 이름은 금대봉, 은대봉이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걱정이 된 자장이 인간의 눈으로는 금탑, 은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내력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 곳 계림은 호수 가운데 어찌 저렇게 높게 금탑, 은탑을 지었을까.
은탑이 조금 작아 보이기는 한다.
약 10층 정도 되는 높이에 불이 훤하게 들어 와 밝히니 주변의 모든 것이 훤해진다.
특히 대우에서 지었다는 호텔이 옆에 있어 더 빛난다.
나중에 계림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계림 시내가 얼마나 작은지 수 없이 이 탑 앞을 지나다닌다는 사실이다.
4일째
이강유람
계림 여행의 백미는 이강유람이 아닐까 한다.
이강과 그 주변에 기묘한 봉우리들이 이강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이강유람은 계림에서 양삭까지 83km 를 강을 따라 유람하는데 우리는 관암동굴 앞에서 강을 내려갈 때 20분, 다시 거슬러 올라오면서 40분을 유람하였다.
거슬러 올라 올 때는 물살이 센 탓인지 시간이 더 많이 소비된다.
강가에는 많은 오리들이 떼 지어 놀고 있는데 같이 탄 부산에서 온 할머니들이 목포의 눈물, 삼학도 등을 아주 구성지게 부르니 주변 경치와 너무 잘 어울린다.
이강의 경치는 글로 적는 것 보다 사진으로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이강의 길이는 437km 이며 계림에서 양삭까지는 배로 갈 수 있으나 83km 나 되고 약 8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나중에 시간이 많이 있을 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배에서 내리니 가마우지 두 마리를 매단 어부가 사진을 찍으란다.
그런데 사진 찍는 것도 공짜가 아니다.
그래서 멀리서 그 어부를 카메라를 당겨서 찍는다.
낮에는 가마우지를 매고 사진 찍어서 돈 벌고 밤에는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낚시를 하여 돈을 번다.
밤에는 가마우지의 목을 끈으로 묶어서 가마우지가 잡은 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잡은 고기를 뱉어내면 그것으로 낚시가 되는 것이다.
관암동굴
계림 남쪽에 있는 종유동굴로 길이는 12km 인데 이강에 근접한 3km 정도만 개발된 상태이다.
뱀을 잡는 땅꾼이 뱀을 잡다가 이 굴을 발견하였다는데 동굴 안에는 석주, 석순, 등이 멋진 장관을 이루며 이 굴 안에 엘리베이터, 열차, 보트,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이강 유람을 끝내고 50m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면 굴 입구에 들어서며 약 100m 정도 더 들어서면 갑자기 커다란 시멘트 다리 같은 것이 나타나서 뭐가 이런 곳이 다 있을까고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위를 쳐다보면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 곳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뻥 뚫린 곳이 땅꾼이 뱀을 잡다가 굴을 발견한 장소라 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아가씨 4명이서 반갑게 맞이하는 중국 노래를 부르고 그 뒤로 열차가 있다.
이 열차를 타고 커다란 굴을 지날 때 남성 4명이서 나팔을 불어 주는 굴을 나가면 이번에는 아주 환상적인 곳에서 사진사가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에 장가계의 용암동굴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거의 나오지 않아서 실망을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사진사에게 찍기로 마음먹고 거금 만원을 주고 두 장을 찍었다. 그
런데 사진이 나온 것을 보니 누가 찍어도 역시나 이다., 뒤에 조명이 울긋불긋하여 사람이 너무 죽어 보여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리막을 걸어서 내려가면 배를 타고 가는데 굴 주위에 조명이 없어서 승객이 등을 들고 앞을 비추면 사공이 물속을 저어간다.
등은 배 안에 사람이 앉는 곳에 하나씩 있다. 물의 깊이는 그리 깊어 보이지는 않으나 불이 없는 곳을 지나려니 괜히 캥긴다.
배에서 내리면 잠시 동안 걷는 곳이 있는데 폭포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여 가까이 가 보니 크지는 않은 곳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마 굴속에서 공명으로 울려 퍼져서 그런 모양이다.
구경을 마치고 밖을 나올 때는 모노레일 타고 나오는데 우리 팀 중에 한 쌍이 무게가 너무 나가는 바람에 기계가 물러앉았으니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부부라도 같이 타지 말고 각자 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노레일이 끝나는 지점에 오면 수많은 장사꾼이 또 물건을 사라고 대들고, 한국 돈을 받은 사람들이 위안화로 바꿔 달라고 조르는 사람도 있다.
일반 관광지 물건도 있지만 찰떡, 옥수수, 고구마와 같은 것을 파는 곳도 있다.
찰떡은 꼭 우리의 호떡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사 먹었더니 그야말로 완전히 찰떡이다.
우산공원
우산공원은 계림시 북쪽 이강 서쪽 기슭에 있는데 순황제가 중국 남방을 순방할 때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당나라 때 산 밑에 우제 사당을 지었고, 송나라 때 남훈정을 지었다고 한다.
순동훈풍은 계림 고대의 유명한 팔경 중의 하나라 한다.
우산공원은 1997년 다시 재건 한 것이며 우산관광구역과 우산오락구역으로 나눈다.
계림 시에서도 자연경치도 아름답고 역사적인 문화유적도 풍부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폭포에 물이 흐르고, 또 한 자리에서 서서 말을 하면 말소리가 울려서 다시 들리는 곳도 있다.
복파산
북파산 정상에 올라 보면 계림 시내가 한 눈에 다 보인다.
바로 앞에는 우산 공원이 보이고, 우리가 묵고 있는 계산호텔도 강 건너 보인다.
계림 시내는 어디에서건 택시를 타더라도 요금이 많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다.
우리가 관암동굴 구경을 마치고 계림 시내로 되돌아오던 도중에 백인 젊은이 한 쌍이 자전거를 타고 관암동굴로 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계림 전체를 자전거를 타고 여행 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되는 곳이다.
이번 여행 중에 특이한 것은 가이드가 표를 끊지 않고 몇 명하고 그냥 사인만 하고 전부 들어간다.
나중에 회사에서 한꺼번에 결제하는 모양인데 조금 아쉽다. 표
를 주면 기념이 될텐데 그것조차 주지 않는다.
입구에서 들어서면 나무를 이용하여 공작 모양의 작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볼만하다. 들
어오는 입구에 복파 장군 동상이 있고 주변에는 장사꾼들도 많고 거지도 많다.
높지 않은 바위산을 올라가는데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계단 숫자를 세면서 올라간다.
산 중턱에 정자가 있는데 정자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여기가 중간입니다.
이제 반 올라 왔습니다 하고 외친다.
산도 산 같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에 서면 계림 시내가 한 눈에 다 보인다.
내려오면 산 바닥에 굴이 하나 뚫려 있다.
입구에 서면 바람이 불어 추운 기분까지 들 정도 바람이 세다,
안으로 들어가면 장사꾼도 있고, 강가까지 가서 뒤로 돌아 올라가면 절도 있다.
절까지 가면 다시 되돌아 와야 한다.
그곳에서 입구로 다시 나오는 길은 없다.
웅호산장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매표소 입구에 오른쪽으로 웅호산장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용호산장이라 하여 호랑이만 있는 줄 알았더니 곰 웅자를 쓴 웅호산장이다.
산장에 들어가면서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호랑이가 떼 지어 있는 모습이다.
몇 백 마리 정도 되는 것 같다. 바깥에서 놀고 있는 놈, 날씨가 더워서인지 물속에 들어가 목만 내 놓고 있는 놈, 숨을 헐떡이며 자는 놈에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
너무 어리거나 상처가 있는 놈은 따로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하나에 따로 누워 있는 놈의 배에 상처가 나 있다.
그 곳에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조금 위험한 지역은 다리 위에서 호랑이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여 놓았다.
산장 내에는 호랑이, 타조, 악어, 사슴, 사자, 공작, 소 등 여러 종류가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곳에서는 동물 쇼를 하는데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건물 내에서 진행하며 냄새도 심하고 크게 볼 것도 없다고 하여 바깥에서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곰 우리에 가면 곰들이 하는 짓이 사람과 비슷한 점이 너무 많다.
나무에 기대어 자고 있는 폼이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 하고 똑같다.
손으로 먹는 것을 먹고 있는 모습도 사람 손이 움직이는 것 같다.
우리 한쪽 끝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대나무 끝에 실에 사과 반쪽을 매달아 곰한테 장난을 치고 있다.
곰이 잡으려하면 채고 채고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해보란다.
나야 뭐 곰 입 앞에 가져다 놓으니 얼른 먹어 치운다.
두 번을 했다.
그러더니 그 아주머니 나보고 1000원을 내 놓으란다.
괜히 돈만 빼앗긴 기분이다.
동물 쇼는 원숭이, 말, 곰, 호랑이 등등이 나와서 하는데 원숭이가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린다던가.
곰이 물구나무 서기를 하면서 가는데 뒷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꼭 춤을 추는 것 같다.
곰이 사람 하나를 매달고 공중에서 오토바이 외줄타기를 하는데 곰도 사람도 아찔하게만 보인다.
원숭이가 자전거를 타고 가고, 곰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말 위에서 사람들이 온갖 재주를 다 부린다.
3부 쇼는 송아지 한 마리를 우리 안에 풀어 놓고 이 송아지를 호랑이가 잡는 장면인데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기는 한데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미리부터 우리 안에 가두어 놓은 송아지는 철망 건너로 보이는 호랑이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다.
시간이 되자 호랑이가 나오는 문을 열어주는 순간 동시에 이 호랑이는 송아지에게 달려들고 놀란 송아지는 자신이 들어 왔던 문을 아는지 그 방향으로 줄행랑을 치는데 얼마 빠른 속도로 달렸는지 대문의 2/3 높이까지 차고 오른 후 문에 부딪쳐 떨어지는 순간 호랑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만다.
채 30초도 걸리지 않는 순간이다.
송아지가 완전히 죽기 전에 경운기가 2대 들어 와 호랑이를 다시 몰아내고 죽어가는 송아지를 싣고 나간다. 차라리 뿔이라도 있는 소를 먹이로 내놓아서 한바탕 싸움이라도 해 보고 죽었으면 덜 안타까울 것 인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 쇼는 아침 저녁 하루 두 번하는데 호랑이에게 죽은 송아지는 이곳에 있는 많은 호랑이 식사로 이용된다고 한다.
돈이 비싸서 그렇지 한번은 볼만한 쇼다.
몽환이강쇼
계림을 가기 1주일 전에 KBS VJ 특공대에서 계림의 쇼에 대해서 소개를 하였다.
그 당시 보기에는 장예모 감독의 쇼가 볼만하다고 생각하여 이번 기회에 장예모 쇼를 보기로 마음먹고 왔다. 그런데 장예모 쇼가 계림이 아닌 양삭에서 열린다고 한다.
계림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구경을 일찍 마치고 2시간 이동하여 1시간 30분 동안 보고 다시 2시간 돌아오면 밤 12시가 될 것 같다.
요금도 장예모 쇼는 50,000원이고 이강 쇼는 30,000원이어서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이강 쇼를 보기로 결론 지었다.
몽환이강(梦幻) 극장 환상매직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국의 전통서커스와 서양 의 발레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환타지아 버라이어티쇼이다.
또 여러차례 국제, 국내 금상을 획득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국가주석과 함께 미국방문 공연에도 참가 하여 수없는 앵콜을 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연 후 만족하지 않으면 입장권을 반납할 수 있는 공연이다. 역동적인 무대와 조명, 음악,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의상과 함께 최고수준의 무희들의 발레쇼와 꼬마악동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서커 스 쇼는 관객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1막2막으로 나누어 약 90분 동안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눈과 귀를 다른데 둘 겨를도 없 이 빠르고 완벽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구성되어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각각의 프로그램이 구성과 내용면에서 인간의 사랑과 중국문화, 계림자연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화장실에도 음향과 미디어로 장치되어 공연실황을 끊기지 않고 계속 감상할 수 있어 새로운 개념 의 공연문화를 시도하고 있다. 1막과 2막 사이 막간을 이용한 휴식시간에도 삐에로가 등 장하여 관객과 함께하는 게임을 유도하는 등 잠시라도 관람객의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고 또한 공연종료 후 함께 출연한 무희들과 악동들이 관람객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또 하나의 몽환이강쇼의 특징이 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극히 드문 환상적인 공연으로 오직 중국의 계림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공연 중에는 절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며 사 진을 찍는 즉시 바로 와 제지를 당한다.
공연 내용은 그대로 DVD로 판매되고 있다.
5일째
요산
요산은 계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비포장에 가까운 도로를 덜컹거리며 가야 하며 가는 도중에 길 양쪽으로 많은 무덤을 볼 수 있다.
약 4000기 정도 된다고 하는데 흙이 없는 바위가 많은 곳이어서인지 몰라도 전부 시멘트로 원 모양의 박스를 만들던가, 사각형의 박스를 만들어서 묘를 만들어 놓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공해문제로 대두 될 것 같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묘를 볼 수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공동묘지를 본다.
요산의 케이블카는 전체 길이가 1416m 이며 높이 차이가 423m 이고 리프트가 175개 이며 편도 시간이 20분 정도 소요되고 매번 507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한다.
리프트를 타고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를 구경할 수 있다. 또 내려오는 길에는 중간 정도 오면 봅슬레이를 탈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봅슬레이는 한번 타는데 5,000원이라고 한다.길이는 1km 이며 18개의 굽이가 있으며 높이는 150m 라 한다. 평균 경사도가 15도이고 시속 35km 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리프트 타고 가는 중간에 봅슬레이가 시작되는 장소에 가면 사진 찍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 사진을 산 정상으로 전송하여 리프트가 정상에 도달하면 사진을 사라고 내놓는다.
이 사진 값도 처음에는 3,000원 달라고 하다가 결국은 1,000원에 준다.
산 정상에서 계림 전체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주변 경치를 화려하게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산 정상에 가면 많은 물건들을 파고 있는데 전부 짝퉁이다. 가격도 무지 싸다.
그러나 쓸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다.
허리에 매는 가방을 하나 샀더니 정상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쟈크 한번 잠갔는데 망가지고 땀 흡수가 전혀 되지 않아서 내려오자마자 내버렸다.
또 공예품인 사과, 원숭이 등등 형태의 공예품을 1개 15,000원 달라고 하는 것을 싸게싸게 하여 3개 20,000원에 샀더니 리프트 타고 산에서 내려와 매표소 입구에는 한 개 5,000원씩 팔고 있었다. 여행용 가방 큰 것을 하나 샀다.
공항에서 짐 포장하는 것보다는 1개 10,000원 하니 그 비용이면 담아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샀더니 공항에 가기 전에 바퀴가 망가져 버렸다.
중국에 가서도 싼 것 뿐 아니라 그래도 제 값 주고 사면 쓸 만한 것 있다고 하니 제값주고 사는 것이 좋을 듯
서울로
우리가 중국을 여행할 때 북경은 넓어서 많이 걷기 때문에 걷는 관광, 서안은 역사 유적지가 많아서 듣는 관광, 계림은 산, 물, 동식물 등 자연을 감상하는 눈 관광이라 하는데 이 세 곳을 이제 전부 관광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