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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항주-황산]이 세상 구석구석/중국 황산 항주 2007. 12. 6. 18:50
항주, 황산 여행기
2006. 07. 14~ 2006,07,17 [인솔자 : 양길영] 모두투어
이번 여행은 중국의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하는 네 번째 여행이다.
첫째는 북경, 두 번째로는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산동반도인 곡부와 태산 세 번째로는 더 남쪽인 상해와 장가계 그리고 이번에 상해 바로 아래인 항주를 여행하기로 하였다.
항주는 상해에서 약 200km 정도 거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항주에서 황산까지는 버스로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항주는 절강성에 속해 있고 황산은 안휘성에 속해 있어 이곳도 지방분권이 있는지 안휘성 지역은 고속도로가 전부 완성 되어 있으나 절강성 부근은 지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교통이 무척 불편하다.
북경 올림픽이 시작 될 때 쯤 이면 항주에서 상해까지 시속 400km 정도로 달리는 고속열차가 운행 된다고 하니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기차가 다니면 상해와 항주는 4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항주에서 황산을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본 모습은 산이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 같으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음직한 산들이 몇 군데 보인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등산 한다고 이야기하기가 부끄럽게 되지 않을까
항주시 개요
항주는 중국 동남연해의 전당강 하류의 북쪽과 경항대운하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예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가 있다” 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도시다.
원나라 때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폴로가 항주를 일컬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번화한 도시”라고 극찬을 했던 것처럼 정말 아름다운 도시이다.
일 년에 2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항주!
항주는 내가 지금까지 가 본 도시 중에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아닌가 한다.
너무 아름다운 도시다.
다른 도시처럼 빈민가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 자체가 공원이다.
곳곳에 수많은 숲, 그리고 그 사이에 나 있는 길 들, 주택은 닥지닥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곳, 하지만 지금 이 곳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엄청난 양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보통 아파트 가격이 평당 600만 원 정도라니까 우리나라의 중소도시의 아파트 가격과 비슷한 것 같다.
서호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유명한 미인 서시를 기리는 의미로 서자호라고도 불린다.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가 서호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에 비유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소동파의 동상은 서호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월나라 왕인 구천이 오나라의 부차에 바쳤던 인물인데 오나라의 왕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아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
중국 역사에서 4명의 유명한 미인이 있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 양귀비, 서시 그리고 왕소군을 말한다.
서시가 항주의 미인이라는 데서 서호를 서시에 비긴 것이다.
서호를 마르코폴로가 ‘사람이 이곳에 서 있으면 천당에 온 느낌을 받는다“ 라고 설파 하였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와 백거이의 성씨를 본떠 제방을 소둑과 백둑이라고 한다.
이 두 제방은 두 개의 잔잔한 파도 위에 놓인 것 같아 관광객들이 제방 위를 지날 때 가까이서 보면 빨간 꽃, 파란 꽃 같고 멀리서 보면 호수 빛이 반짝여서 걸음걸이에 따라 경관이 바뀌는 교묘함을 맛 볼 수 있다.
제방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수양제가 심어서 버드나무 아래에서 즐겨 놀았다고 수양버들이라고 안내 가이드가 이야기 하는데 조금 이야기가 틀린 것 같다.
수양버들은 어린잎이 적갈색이고 능수버들은 녹색을 띠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 아닐까
수양제가 경성에서 항주까지 경강대운하를 건설했다니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할 것이다.
지금은 그 운하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
백거이는 “항주에 가는 일이 있다면 그 절반은 서호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서호는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삼정, 왕곤돈 등 3개의 섬이 있으며 총 면적은 60,8km2이며 그 중 물의 면적은 5,66km2 이고 깊은 곳은 2,8m 이며 깊지는 않으나 그 아래에는 뻘이 10m 가 넘는다고 한다.
서호는 안개가 끼어 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둘레가 15km에 달하니 제천 의림지의 7배 정도의 크기이다.
호수 안에 있는 섬은 중국의 1원짜리 지폐에 그림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호수 입구에는 소동파의 동상이 있으며 건너편으로는 연꽃이 만발하고 있다.
소동파 동상 옆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인파로 넘쳐난다.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밀려 갈 정도로 인파가 넘치며 그 길을 운행하는 10명 정도 탈 수 있는 차도 있는데 인파가 너무 많은 탓인지 걷는 것보다 느리다.
10분 정도 걸어가면 배를 타는 곳이 나오는데 조그만 배도 있고, 유람선도 있다.
조그만 배는 노를 젓는 사공이 있으며 사공은 손님의 등을 보이고 노를 젓는데 어떤 재주꾼은 발로 노를 젓고 있다.
유람선의 속도가 빠르지 않아 한마디로 유람선이다.
아주 천천히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 걸린다.
한 시간 도는 동안에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주 영원히 살고 싶기만 하다.
항주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서호 때문이라고 하는데 너무 아름답다.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곳에는 수많은 중국 국내인과 외국인이 뒤엉켜 한마디로 세계화 된 곳이다.
유람선 안에서 한국관광객이 중국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니 중국인들이 너무 좋아하면서 박수를 치고 같이 따라 부르고 그야말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장소이다.
중국의 유람선하고 한국의 유람선하고 다른 것은 전혀 노래가 없다.
조용히 앉아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내 스타일에 딱 맞는다.
서호에는 수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 많은 전설을 우리가 전부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이라는 이야기인데 두 뱀의 이야기인데 우리가 듣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다.
육화탑
육화탑은 970년 오월왕 전홍숙이 전당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운 탑이다.
밖에서 보면 13층인데 실제는 7층에 높이가 60m 이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전단강을 발아래 볼 수 있다.
육화탑 오르는 계단에서도 입장료를 받고 탑 안으로 들어가려면 또 입장료를 내야 한다.
계단에서는 15원을 탑 안에서는 10원을 내야 한다.
그러나 탑 안으로 들어가도 위로 올라 갈 수는 없다.
전단강은 절강성 제일의 강이며 해마다 음력 8월 18일 전후가 되면 바닷물의 역류가 일어나는데 이 현상은 아마존의 대역류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 현상은 전단강 하구의 나팔 모양에 기인한다.
항주만으로 흘러드는 하구는 100km 에 달하는 강의 넓이가 상류로 가면 급격히 좁아져 육화탑 부근에서는 2km 에 불과 할 정도로 좁아지기 때문에. 만조 시에는 대역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
파도치는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한다” “나이아가라를 듣는 듯하다” 는 서양인들의 감탄사는 유명하다.
전단강은 안휘성에서 발원하여 절강성을 지나 항주 앞 바다에 이른다.
영은사
인천공항에서 항주공항까지는 1시간 45분이 소요 된다.
인천에서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한 아시아나 항공이 오후 3시 30분에 항주공항에 도착한다.
항주는 서울 시각보다 1시간이 느리다.
시간을 2시 30분에 맞추고 공항을 빠져 나와 바로 중국의 10대 고찰 중의 하나인 영은사를 들러 구경을 한다.
절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고 또 엄청난 인파에 놀란다.
절의 입구에는 머리에 혹이 난 사람, 팔 다리가 없는 사람 등등해서 말로 표현하기 힘이 들 정도의 많은 거지들이 한국말로 “아줌마, 아저씨 도와 주세요 ” 울부짖는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내 갈 길을 간다.
왜냐하면 안내 가이드가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신신 당부 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저 거지들을 이용하여 돈을 모으는 뒤에 버티고 있는 조직이 따로 있고 하나 도와주면 저 사람은 도와주는 줄 알고 주변에 있는 거지들이 떼거지로 대들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어서 다음 코스 진행이 안 되니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란다.
그 유명한 관광지이고 사찰임에도 주변은 정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지저분하다.
한쪽에서는 한창 공사 중인 것을 보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아주 깨끗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영은사는 중국의 10대 고찰 중의 하나라고 한다.
영은사가 처음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동진시대[서기 300년]이므로 1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인도의 승려 혜리가 항주 비래봉의 산수가 특이하게 생긴 것을 보고 仙靈所隱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사찰을 시작하였다 하며 영은사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한다.
영은사의 주요 건축물은 天王殿 ,大雄寶殿 ,藥師殿과 雲林藏室이다.
천왕전에는 운림선사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청대 강희 황제의 자필로 알려져 있다.
강희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 영은사에 들렸을 때 사찰의 고승들이 사찰의 이름을 친필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자의 비례를 생각하지 않고 靈자에서 雨자를 너무 크게 적어 넣어 밑의 글자를 써 넣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당황해 하자 옆에 있던 신하가 손에 글씨를 써서 자연스럽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황제는 눈치를 채고 “운림선사” 라는 글자를 적었다고 한다.
황제는 “ 이 숲을 이루어 열을 만든 절이로다” 라고 설명하니 그제서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또 안에는 모든 4대 천황이 모두 발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청나라의 초대 황제가 어린 시절 영은사에서 도량을 넓히고 있을 때 청소를 하면서 “빗자루로 청소를 하려고 하니 발을 좀 들어 보시오” 라고 하자 4대 천황이 발을 들어 그때부터 발을 들고 있다고 한다.
뒤편에 보면 납으로 만든 조각품들이 천장 높이까지 만들어져 있는데 어떻게 만들었을까 신기하기도 하다.
최근에도 불공을 드리는 사람과 관광객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대웅보전은 높이 33,6미터 이며 중국의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보전 안에는 24,8미터의 불상이 있는데 1956년 절강미술대학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걸작이다.
또 20종자 천불상이 있고 대전 앞에는 송 대에 건축 된 8각 9층 석탑이 두 개 있다. 약 1700년 전의 작품이라는데 여기저기 깨진 곳이 많아도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보물이네, 국보네 하고 난리법석을 칠 텐데 말이다.
옆 건물로 가면 500나한을 모신 곳이 있는데 여기서 하나 배운 것..
나무아미타불 할 때 나무는 南無 라는 사실이다.
500나한의 이름이 전부 남무로 시작되고 그 밑에 두자의 글씨가 더 있다.
그리고 500나한의 모습들이 동양인의 모습이 아니라 전부 서양인들의 모습으로 조각하여 놓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영은사 볼거리 중 가장 유명한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09 미터의 봉우리로 석각조상 330 개가 새겨져 있다.
영은사내에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특히 비가 오면 사원 전체가 안개에 싸여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계곡 옆 바위에는 조그만 불상들이 촘촘히 있는데 신기하기만 하다.
송성가무쇼
황산시 개요
안휘성은 양자강 하류에 있는 성으로 북동으로 강소성과 남동으로 절강성과 접해 있다.
안휘성은 인구가 약 6000만 명이며 중국의 23개 성 가운데 면적이 가장 적다.
성 안에는 양자강과 회하 2개의 강이 흐르며 이 두 개의 강으로 인해 중앙부에는 광활한 전원지대를 이룬다.
기후는 온난 습윤하여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평균 기온은 1월 2,7도 . 7월에는 27,9 도 정도이다.
북부 지역에는 강수가 여름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강의 범람이 자주 있고 봄에는 가뭄이 심하다.
안휘성은 농업지대로서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며 남부의 양자강 유역은 쌀, 보리의 이모작이 북부의 회하강 유역에는 밀, 참깨, 수수, 옥수수 등 밭작물이 성하다.
그 이외에 강의 남쪽에는 차가 많이 생산된다.
안휘성을 대표하는 산은 황산과 구화산이다.
황산은 그 아름다움이 유명하며 구화산은 보타산, 아미산, 오대산과 더불어 4대 불산 중의 하나이다.
또 차가 유명하기 때문에 산지와 구릉에는 산꼭대기까지 계단을 형성하여 차 밭이 이루어져 있다.
황산은 차 거래가 유명했던 둔계시와 서센, 슈닝센, 황산 풍경구 등과 함께 황산시로 편입 되었다.
따라서 둔계역은 황산역으로 둔계공항은 황산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화산미굴
아침 식사 후에 화산 미굴로 향하는데 아주 좁은 시골길로 간다.
그러나 5분도 채 못가서 차가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가이드가 앞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더니 이 나라는 한번 사고 나면 언제 그 체증이 풀릴지 모르니 걸어가야 한단다.
걸어서 앞으로 가면서 사고 지점에 가보니 조그만 오토바이가 앞에 가는 조그만 버스를 받았는데 그냥 합의하고 수리를 해 주면 될 것 같은데 해결할 생각을 안 한다.
그 자리에 공안이 차를 타고 와 있는데 일을 해결하려고 왔는지 아니면 공용차를 가지고 자기 아이들 학교 보내 는 중인지 구분이 안 된다.
공안 차에는 공안이 운전석에 앉아 있고 뒤에는 학교 다니는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타고 있다.
바로 앞에서 사고가 났으면 어떻게 빨리 처리를 해 주면 좋을텐데 이 공안도 무조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10분 정도 더 걸어가니 그때서야 공안 차가 들어온다.
1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하는데 내려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마을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무엇 때문일까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진료소이다.
집들을 보면 지붕이 까맣고 벽은 하얗게 칠을 해 놓았는데 지붕의 기왓장이 너무 얇다.
그 이유인 즉 도둑이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러고 보면 중국 무협영화가 보면 지붕위에서 지붕에 발이 닫기 전에 붕붕 나르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의사가 진료를 하고 있는데 바닥 청소는 하지 않아 불결하고 환자들은 링거 주사를 그냥 의자에 앉아서 맞고 있다.
이런 시골구석까지 진료소가 있는데 환자가 너무 많다,
정부에서 무료로 진료를 하여 주는지 아니면 개인병원인지 모르나 많은 환자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밖에까지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
동사무소 비슷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열심히 적어 내고 있다.
이 곳 시골풍경도 우리네 시골과 비슷하다.
논농사는 이모작이라 그런지 이제 막 심은 벼와 누렇게 익은 벼가 같이 붙어 있고 논갈이를 손으로 하는지 아낙네가 논을 고르고 있는데 남정네는 어디가고 아낙네가 저 힘든 일을 하고 있을까
화장실에서 나온 똥 짐이 지나가는데 이것도 아낙네들의 몫인지 두 아낙네가 길에 철철 흘리면서 지나가는데 그 냄새가 진짜 고약하다.
얼마나 오래 되었으면 썩는 냄새가 저렇게까지 진동을 할까 싶다.
밭에 심어져 있는 오이나 가지, 옥수수 그리고 큰 수박까지 우리의 시골과 다를 바 없다.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멀리 멋있게 생긴 다리가 보인다.
양쪽에는 흰 색의 고딕 건물이 보이고 양쪽으로 줄에 매어진 다리가 있는데 아마 저 곳으로 가겠지 했더니 추측은 맞는다.
화산미굴 입구에서 주차장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가 풀썩인다.
단지 화장실에는 돈을 받지 않는다.
오래전에 태산에 갔을 때 산 정상에서 화장실 입장료를 받는데 화장실이 얼마나 지저분하던지 그 생각이 나는데 이제 중국도 많이 변하나보다.
“小心基滑” 무슨 뜻 인고 하니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오” 하는 뜻이다.
이 글자는 황산, 항주 화장실, 식당, 호텔 입구 어디에 가도 볼 수 있는 표지판이다.
화산미굴에 가기 위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가기 전에 인력거꾼들이 인력거를 타고 가라고 아주 못살게 군다.
걸어가면 장사꾼들이 또 물건 사라고 못살게 굴고 귀찮기만 한다.
물건을 한 사람한테 사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사라고 조른다.
아마 하나 샀으니까 다른 것도 사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초원에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데 너무나 목가적이다.
다리를 건너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올라가 흔드는 바람에 너무 심하게 출렁거려 걷지 못할 정도이다.
나중에 되돌아 올 때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냥 다리를 걷는 것과 똑 같은데 아마 서로 재미있으라고 흔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화산미굴은 현재 36개가 개발 되었으며 2호화 35호만 개방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입구에서 가까운 35호 굴로 들어간다.
입구에는 강택민 주석이 왔다 갔다는 휘호가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입구를 지키고 있다.
강을 건너오기 전에 강 건너 산에도 있더니 흔적도 많이 남겼어라.
화산미굴은 안휘성내 황산시 경내 둔계와 흡현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화산미굴은 청산, 녹수, 전원풍경, 천년의 미지석굴, 마애석각, 석굴, 자연명소 인문경관이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지금까지 발견한 석굴이 36개가 있으며 석굴의 규모가 크고 기세가 독특하여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런 동굴이 어떻게 형성 되었으며 그곳에서 나온 석재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또 어떻게 돌을 캐어 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굴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밀려오면서 아주 커다란 굴이 나타난다. 이곳은 항시 17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정으로 쪼았던 흔적이 숫한 세월이 흘렀건만 그 흔적은 그대로이고 집을 짓듯이 만든 굴이 너무 정교한 모습이다.
기둥의 모습도 예술 작품처럼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으며 중간 중간 고여 있어 그 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흐르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분명 연못과 연못 사이에 물이 흐른 흔적은 없건만 높이차에 따른 물의 고임의 수수께끼는 수학자나 지질학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일까.
많은 의문과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 굴임에 틀림이 없다
황산
황산의 연 평균 기온은 7,8도 거의 여름이 없다.
황산은 구름과 안개와 바람의 산이다.
6월 중순부터 1개월 동안은 장마철이며 황산의 운해를 볼 수 있는 계절은 7월말부터 9월 말까지이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의 높이는 1630m 이며 이곳까지 버스가 올라간다.
깎아지른 절벽을 깎아 만든 도로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 가면 외국인 입장하는 곳과 내국인 입장 하는 곳이 따로 있으며 외국인은 귀빈실을 이용하는데 케이블카를 타는 것도 우선순위를 준다.
황산은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만 대설은 드물다고 한다.
사람이 적으며 설경이 아름다운 1월이 아주 인상적이라 한다.
황산의 풍경은 매 계절마다 매 시간마다 바뀌며 변화한다.
그러므로 황산의 큰 매력은 변화에 있다.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에 싫증을 느끼질 못한다.
황산은 3奇 라고 하여 奇松, 奇岩, 雲海를 든다.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기암절벽에 어느 별천지에나 있을 법한 소나무들이 서 있는 사이로 상서로운 구름이 시시각각 움직이며 오묘한 형상을 구현해 낸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시종일관 비가 온다.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앞 1m 도 안 보일 정도로 가시거리가 좋지 않다.
비가 오는 속을 수많은 인파 속에 떠밀리면서 구경도 못하니 조바심이 난다.
세계문화와 자연유산목록에는 “天下 第一奇山” 이라 표현 되어 있지만 전혀 볼 수 없으니 이어찌 안타깝지 않을까.
진나라 때에는 이산이라 불리다가 당나라 현종 때 [747년]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이야기에서 황제격인 황산으로 바뀌었다.
중국인은 황산을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할 산으로 꼽는다.
1년 365일 중 280일이 안개와 빗속에 있는 산,
어제 항주 공항에 도착하여 영은사를 둘러보고 저녁 식사 후에 밤 11시 30분 이 넘어 호텔에 도착하여 늦게 잠을 청하고 아침 일찍 일어났고 아침 식사 후 화산미굴을 관람하고 점심 식사 후 황산을 오른다.
황산 아래 마을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일 하는 아주머니가 연변 사람인지 북한 사투리가 아주 심하다.
식후에 버스로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보는 주변의 경치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 와 있음에도 또 아열대 기후임에도 온대 기후와 비슷한 느낌이다.
자라고 있는 나무와 숲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보던 모습 그대로이다.
남대문검표소를 지나 산을 오르기 위해 버스가 꼬불꼬불한 길을 오르는데 울창한 대나무 숲이 위용을 자랑하고 좁은 코너 길에서 차들이 교행 할 때는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가 지체가 되기도 한다.
선방인지 수련원인지를 지나면서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 물에 한번 놀라고 버스 앞쪽으로 보이는 길을 보며 또 한번 놀란다.
흙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고 바위만 있는 절벽을 깎아서 길을 만들 생각을 한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버스가 계속하여 오르다 약간의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주차장이 나타나고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화장실이 참으로 불편하다. 케이블카 타는 곳인 운곡검표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버스가 입구에 들어올 때 언덕배기까지 다시 되돌아가야 볼일을 볼 수 있다.
케이블카는 외국인들은 귀빈석을 통하여 입장할 수 있는 배려를 해준다.
케이블카는 약 8분 정도면 백아령에 도착하는데 비록 비가 오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케이블카는 두 대가 교차로 운행하며 운곡매표소에서 백아령까지는 2,8km의 거리이다.
백아령에 도착하니 운곡사로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자리가 비좁다.
비는 억수로 퍼붓는다.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은 일화용 우비를 입고 거의 사투를 벌이며 올라온 모습이다.
백아령을 떠나 계속하여 오르막을 오르면 200~ 300평 정도 되는 평지가 나오고 호텔이 하나 나온다.
이후로는 거의 평지를 가는데 1m 앞도 안 보이는 조망 덕분에 앞 사람 뒤꿈치만 보고 간다.
안부에 이르러 앞에 펼쳐 있는 것이 천해라고 하는데 보이는 것은 구름과 안개와 비뿐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광명정에 도달한다.
1840m 의 표지판이 있고 산 위에는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기상대라 한다.
50년 전에는 절이 있었는데 불로 인하여 소실되고 그 자리에 기상대를 지었다고 하며 황산의 모든 것은 그 기상대에서 통제한다고 한다.
여기서 20분 정도 진행하면 비래석에 도착하는데 주변 경치는 물론 30m 앞에서도 비래석의 경치를 사진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기후가 좋지 않다.
비래석은 높이가 12m, 넓이가 8m, 두께가 1,5m ~ 2,5m 에 이르며 하늘에서 떨어 진 듯한 모양 때문에 비래석이라 한다는데 자세히 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비래석 오르는 길은 5m 정도 되지만 두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한 줄로 올라간 후 내려오는 팀이 내려오고 해야 한다.
올라가도 안전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기다
비래석을 올랐다 내려오니 앞 팀들은 전부 어디로 가고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을 부지런히 따라가니 조그만 평지가 나오고 안쪽으로 물건도 팔고 하는 가게와 커피숍이 있다.
우리 말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잠시 기다리는 동안 서해대협곡 갈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서해대협곡을 갈 사람은 왼쪽으로 가고 바로 숙소[서해호텔]로 갈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야 한단다.
여기까지 온 것 서해대협곡 안 보고 갈 수 있으랴.
손을 번쩍 들었더니 이 가이드 가지 말았으면 했다가 내가 손을 드니 전부 따라 나선다.
황산을 와서 서해대협곡을 구경하지 않으면 황산을 온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안 갈 수 있으랴.
5분 정도 가면 배운정에 도달하는데 황산에서 이곳이 석양을 보기 가장 좋다고 하는데 The아지는 빗속에서 무엇을 구경할 수 있을까.
배운정 난간에는 수많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장가계에 갔을 때도 이런 모습이 있는 곳이 많이 있던데 황산에도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사랑에 매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이런 절벽 위에 와서 변치말자는 의미로 자물통을 채워놓고 각자 열쇠를 가지고 그 열쇠를 절벽 아래로 던지는 풍습이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외국 TV프로 “위대한 레이싱 ” 인가하는 프로에서 자물통을 매달아 놓고 열쇠만 주며 자물통을 여자보고 찾으라는 게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수천 개의 자물통 하나하나를 열어가면서 찾는데 어떤 한 쌍은 포기하기도 하고 대부분이 손에 물집이 잡히고 고생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 배운정에 매달린 양 정도의 자물통이라면 금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TV에서 본 지역은 어디인지 엄청난 양의 자물통을 본 적이 있다.
서해대협곡을 이 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다는데 앞이 전혀 안보이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있을까.
발길을 돌려 숙소로 향한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오후 4시 30분 아직 시간은 많은데 저녁 시간은 07시로 딱 정해져 있단다.
피곤한 탓인지 저녁 식후 그냥 정신없이 잠을 잤다.
다음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새벽 3시에 눈을 떠 짐 정리를 하느라고 부시럭 거렸더니 집사람이 핀잔을 준다. 몇 시인데 벌써 소란을 피우냐고....
4시 30분에 집사람에게 호텔에 있는 방한복을 입혀 해돋이를 보러 간다.
또 하나의 호텔을 지나 청량대인지 뭐 하는 곳으로 30분 정도 걸린다는 거리를 20분 만에 부지런히 갔다.
그러나 해가 뜬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해는 오르지 않고 오늘도 글렀구나 하는 포기감....우리나라에서도 해돋이 보러 가면 10번 중에 한번 보기 힘든데 어쩌다 찾은 길에 해돋이를 본다면 그야말로 신의 가호가 깃든 것이겠지...
어제 아무리 우중이지만 서해대협곡 구경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여 가이드에게 배운정에서 서해대협곡 구경하는데 몇 시간 걸리느냐고 물어 보니 왕복 한 시간 걸린단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한 시간 걸린단다.
아예 빠져서 나가는 길은 없고 갔다가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길만 있단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
어제 시간이 많아서 1시간이면 충분히 갔다가 올 수 있는 것을 인테넷을 보니 서너 시간 걸리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 시간 정도 였다면 가이드 없이도 충분히 갔다가 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다음에 어디 다시 오기가 쉬운 길인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이드가 갑자기 보기 싫어진다.
6시 40분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백아령에 왔건만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케이블카 운행을 못한단다.
결국 걸어서 내려가기로 결정을 하고 하산을 한다. 전
부 돌계단으로 만들어 놓아서 무릎이 약한 사람은 충격이 심할 것 같다.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이 뒤엉키고 산 위에 있는 호텔로 일상용품을 나르는 짐꾼들과 같이 뒤섞여 엄청나게 혼잡스럽다.
수많은 중국인들도 어린애까지 동원하여 걷는데 중국인들은 “살아생전에 황산 한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다” 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산 정상에 있는 필요 물건들을 여기서는 짐꾼들이 직접 나른다.
짐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기 위함이라는데 70 ~ 80 kg 을 메고 오르는 짐꾼들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중간에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사람이 오히려 너무 편해 보인다.
1시간 40분을 걸어 내려오니 운곡매표소에 도착한다.
모두 도착하면서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버스는 황산 시내로 향한다.
황산 시내에 들어가서 점심 식사 후에 예전의 청나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시장을 구경한다.
우리나라의 서울의 인사동 거리 비슷한 곳이다. 이것저것 구경하니 좋다.
여행사 직원 따라 물건 파는 곳 돌아다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이것저것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물건 값도 깎을 수 있고 또 중국의 풍습을 볼 수 있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손짓으로 다 통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사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이번 여행은 서울 상계동 팀 11명, 남양주 팀 9명, 경남 함양 고등학교 동기생 남자 3명 그리고 우리 내외가 같이 한 여행이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보면 대부분이 부부끼리 와서 여행을 하면서 같이 어울리고 했는데 이번만은 부부지간에 간 것은 우리 내외뿐이어서 조금은 상대방 팀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서로가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행운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부부끼리 모이면 저절로 서로 어울리면서 거기에 맞는 색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데 이번에는 각자의 팀들이 있으니 각자 팀끼리 어울리기 바쁜 바람에 우리는 한마디로 외톨이가 되었지만 덕분에 둘이서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팀들에게는 우리가 불륜처럼 비추어졌나 보다.
이번 4일간의 여행은 즐거운 여행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중이었지만 서해대협곡을 갔다 왔어야 했는데 갔다가 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 황산 가이드한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제 내년에는 어디로 갈까 ..
서울로 향하는 아시아나 항공에서 나누어 준 신문에는 한국에 홍수가 나서 전부 쓸어 가 저렸다는 기사가 도배를 하고 있고 서울에 도착하여 집에 갈 때까지 억수로 퍼붓는 비에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지경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